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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안톺아보기]日전범기업 나쁘지만, 복사해 붙인 법안은 쫌

  • 2019.08.19(월) 10:49

설훈 의원, '전범기업 입찰자격 제한' 국가계약법 개정안 발의
9년 전에도 똑같은 법안 'WTO 정부조달협정 위반' 우려로 폐기
법안 취지는 좋지만 정교하지 못하면 일본에 '빌미' 제공할 수도

일본의 무역 도발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전범(전쟁범죄)기업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전범기업이란 전쟁 당시 자국이나 점령지 식민지의 국민들을 강제 징용해 막대한 이익을 올리는 등 전쟁범죄 행위에 적극 가담해 성장한 기업을 말합니다.

일제강점기, 특히 군국주의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강제동원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를 통해 남긴 이익을 바탕으로 지금도 세계적 회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일본기업이 많습니다. 미쓰비시, 일본제철, 히타치, 파나소닉 등이 대표적입니다.

일본 전범기업 가운데 일부는 한국 정부나 광역자치단체가 발주하는 입찰에 참여해 돈을 벌기도 합니다.

최근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조달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4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각 부처·광역단체 등은 3586억원 상당의 일본 전범기업 제품을 구매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정부·광역단체에 물건을 판 일본 전범기업들을 금액 순으로 나열해보면 히타치(1367억원)가 1위이고 ▲후지(1208억원) ▲파나소닉(659억원) ▲도시바(180억원) ▲미쓰이(94억원) ▲니콘(74억원) 순입니다.

설훈 의원은 이러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일본 전범기업에는 한국정부를 상대로한 국가계약 입찰자격을 박탈하는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국가계약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습니다.

법안 내용은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강제동원조사법)에 규정된 피해자들의 생명·신체·재산 등에 피해를 입힌 후 공식사과와 피해배상을 하지 않은 일본기업에 대해 입찰참가자격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법안을 발의한 설훈 의원은 "우리 국민들의 불매운동뿐만 아니라 최근 서울시, 경기도 등 주요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일본 전범 기업과의 계약을 제한하도록 하는 조례를 추진하고 있다"며 "국회도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은 일본 전범기업에 대해 국가계약 입찰자격을 제한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과 주체성을 지키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취지에도 실제 법안이 제대로 논의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설훈 의원이 내놓은 법안 내용은 정확히 9년 전인 2010년 8월 이명수 자유한국당 의원(당시 자유선진당 소속)이 발의했다가 폐기한 국가계약법 개정안과 단 한글자도 다르지 않고 똑같습니다. 복·붙(복사해서 붙인) 수준입니다.

물론 똑같은 법안이라고 해서 모두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겠죠. 9년 전에는 아쉽게 통과하지 못한 법안의 취지를 잘 살려 지금의 흐름에 맞게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훈 의원이 내놓은 법안은 9년 전 해당 법안이 통과하지 못한 이유를 꼽씹어보지 않고, 지금의 한일관계 분위기에만 편승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습니다.

9년 전 국회에서 해당 법안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특정국가 혹은 민족의 기업에 정부입찰참가를 배제하는 건 WTO 정부조달협정(GPA)에 저촉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국회에서는 외교적 마찰을 포함해 종합적으로 개정 여부를 결정해야한다는 의견이 모아졌고, 결국 일본 전범기업에 국가계약 입찰자격을 제한하는 법안은 자발적으로 폐기했죠.

그 대신 WTO 정부조달협정 개방 대상기관이 아닌 7개 중앙부처, 기초자치단체, 교육청, 초중고 등에 한해 정부지침으로 전범기업의 입찰을 제한하기로 했습니다. 외교적 마찰을 줄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찾기로 한 것이죠.

9년이 흘러 똑같은 법안을 발의한 설훈 의원은 지난 16일 '日 전범기업 국가계약 입찰자격 제한 추진'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면서 법안을 홍보했습니다. 하지만 보도자료 그 어디에서도 과거 똑같은 법안이 통과되지 못했으나 이번에는 법안을 더 보완해서 통과되도록 하겠다는 설명은 없었습니다. 또한 설훈 의원실 담당자도 'WTO 정부조달협정 위반 관련, 내용을 고민하거나 당시와 바뀐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사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이 정부발주사업까지 참여해 돈을 벌고 있는 일본 전범기업의 행태는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렇다고 세밀한 검토없이 무작정 이들에게서 정부조달 입찰자격을 빼앗겠다는 것은 일본에 새로운 외교·무역분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더 나아가 우리정부가 국제사회를 향해 호소하고 있는 '자유무역 질서'란 논리를 훼손하지 않을 지 걱정이 앞섭니다.

어느때보다 일본의 무역도발이 거세고 한일관계가 평행선을 달리는 현 시점에서 이런 법안을 냈다는 것은 분명 주목을 끌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일수록 더 정교한 법안 발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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