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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기업 팩트체크]②강제동원 대명사 '미쓰비시'

  • 2019.09.23(월) 13:00

<비즈니스워치 특별기획 전범기업 분석> 미쓰비시
훗카이도 비바이광업소에 조선인 2800명 동원
지옥문으로 불린 군함도탄광 등 작업장 281개
창립자 이와사키 가문 물러났지만 미쓰비시는 계속
니콘·기린맥주도 미쓰비시 계열사…출발부터 연관

#훗카이도 설원과 조선인 노동자 

훗카이도(北海道)는 대표적인 일본 관광지다. 훗카이도를 가려면 신치토세 공항을 거쳐야 한다. 일본정부통계종합창구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신치토세 공항을 방문한 전체 외국인 수는 146만1679명이며, 이중 한국인은 48만1730명으로 3분의1을 차지한다.

훗카이도의 중심도시 삿포로 왼쪽에 영화 러브레터의 촬영지 오타루가 있다. 삿포로의 위쪽으로 가면 비바이시(美唄市)가 나온다. 비바이시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눈이 소복이 쌓인 설원에서 '오겡끼데스까(お元気ですか)'를 외치던 영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을 떠올릴지언정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석탄을 캐던 조선인 노동자,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의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는 관광객은 드물다.

산악지대인 비바이시 동부는 탄광이 많아 석탄 생산지로 유명하다. 그 곳에는 태평양전쟁시기 일본 최대 재벌 중 하나인 미쓰비시(三菱)가 운영하던 비바이광업소가 자리잡았다.

미쓰비시 계열사인 미쓰비시광업은 1915년 비바이광업소를 인수해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비바이철도선이 개통되며 생산량이 증가, 훗카이도 지역의 유명 탄광이던 오유바리탄광과 더불어 미쓰비시의 주력탄광으로 명성을 얻었다.

강제동원 피해자 유순희는 1940년 3월 미쓰비시광업 비바이광업소로 동원돼 2년간 노무생활을 했다. 사진은 피해자 유순희가 1942년 4월 2일 미쓰비시광업 비바이광업소에서 받은 상장이다. 상장은 ‘유순희가 1940년 3월 입소한 이래 2년 동안 회사의 중요한 업무에 정진한 공적으로 상장을 수여한다’는 내용이다. [자료= (사진으로 보는)강제동원 이야기:일본 훗카이도피해구술자료집/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하지만 비바이광업소 명성 뒤에는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한이 서려 있다. 미쓰비시는 1939년 10월부터 조선인을 강제동원하기 시작해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까지 무려 2800여명의 조선인을 비바이광업소에 강제동원했다.

#지옥섬 '하시마'와 미쓰비시광업

미쓰비시의 강제동원은 훗카이도를 포함 일본 전역과 한반도 등 복수의 국가에서 자행됐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이하 대일항쟁기위원회)'가 발간한 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미쓰비시(관련 계열사 포함)는 한반도와 일본, 사할린, 동남아, 중국 등에 무려 281개의 작업장을 운영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쓰이계(129개), 스미토모계(91개) 등 태평양전쟁시기 3대 재벌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은 작업장 수를 기록했다.

1810년 군함도(일본어로 하시마)서 석탄을 발견하면서 탄광산업이 발전했고 1890년 미쓰비시가 섬 전체와 광구 권리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인 석탄산업이 시작된다. 일본 나가사키현 관광진흥과는 군함도의 강제동원 전력을 함구한 채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관광명소로 홍보하고 있다. 지난 201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자료=나가사키현 관광진흥과]

영화로도 제작됐던 하시마(端島)에서 자행된 강제동원은 미쓰비시의 대표적 전범행위로 꼽힌다. 훗카이도와 정 반대에 있는 나가사키 현(長崎県)에 바다에 있는 하시마는 1890년 미쓰비시광업이 인수했다.

이곳에서 이뤄진 조선인 강제동원은 그야말로 참혹하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대일항쟁기위원회가 2012년 발간한 '사망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실태 기초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하시마로 들어오는 출입문은 갱부들에게 지옥문으로 불렸으며 인신구속과 착취, 노동에 지친 하시마 갱부들은 익사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에 뛰어들어 도망을 시도했다'고 기록한다.

훗카이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혹독한 추위에 견뎌야 했다면 하시마탄광 조선인 노동자들은 훈도시(일본 남성 전통속옷)만 입고 45도의 고온을 버텨야 했다. 이러한 잔혹한 역사에도 일본은 지난 2015년 하시마를 일본의 근대산업시설 23곳 중 하나로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전후 미쓰비시는 해체됐다?NO

미쓰비시는 계열사, 자회사, 회원사 등 일명 미쓰비시계로 불리는 기업 수만 613개(9월 기준)에 달하는 일본 최대 그룹이다. 미쓰비시 그룹 홈페이지에는 회사의 역사가 1870년부터 시작됐다고 소개하고 있다.

미쓰비시의 창업자는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郎)다. 이후 동생인 이와사키 야노스케(岩崎彌之助)가 광산·조선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야노스케의 아들이자 3대 사장인 이와사키 히사야(岩崎久彌)가 조선소 확장, 고베제지공장(현 미쓰비시 제지) 및 기린맥주, 아사히글라스 설립을 주도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하면서 연합국최고사령부(GHQ)의 재벌해체방침에 의해 미쓰비시는 해산했다. 이후 조선, 광산, 은행 등 미쓰비시의 각 계열사는 독립적인 회사로 남았다. 하지만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체결 이후 3개로 쪼개졌던 미쓰비시중공업이 합병되고 미쓰비시상사도 다시 결합하는 과정을 거쳤다.

특히 흩어져 있던 계열사를 다시 불러 모은 것은 킨요카이(금요회, 金曜会)의 역할이 컸다. 킨요카이는 1954년 출범한 미쓰비시그룹내 사장단 모임이다. 이 모임을 통해 그룹 내 계열사들의 결집을 강화한다.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이 모임은 미쓰비시 그룹 내 공통 사회안건을 심의하고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야에서의 교류 활동을 한다.

태평양전쟁 직후 해체 이후 창업자 이와사키 가문이 미쓰비시그룹 경영진에 이름을 올린 일은 없다. 하지만 총수가 바뀌었다고 기업의 역사까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동원의 대명사였던 미쓰비시가 지금의 미쓰비시를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지난 2012년과 2018년 대법원 판결에서도 드러난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미쓰비시를 상대로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대법원은 '전쟁 당시 미쓰비시와 현재의 미쓰비시는 실질적으로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봄이 타당한 만큼 동일한 회사로 평가하기 충분하다'고 판결요지에 설명했다.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 미쓰비시

카메라로 유명한 니콘(Nikon), 한국에서도 인기 많은 기린맥주는 대표적인 미쓰비시그룹 계열사다. 니콘과 기린맥주는 킨요카이 회원사(현재 27개사가 가입)이기도 하다.

니콘은 1917년 미쓰비시 4대 사장인 이와사키 코야타(岩崎小彌太)가 출자해 만든 일본광학공업주식회사가 전신이다. 1946년 소형카메라 명칭을 '니콘'으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때 제품 명칭이 현재의 기업명이 됐다.

미쓰비시 계열사인 미쓰비시UFJ은행과 미쓰비시UFJ신탁은행은 지난해 기준 각각 니콘의 지분 1.9%, 1.4%를 보유해 대주주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1885년 요코하마 인근 양조회사에 미쓰비시 2대 사장 이와사키 야노스케가 주주로 이름을 올렸다. 이 양조회사는 1907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기린맥주 주식회사로 변신했다. 이때 기린맥주 창립에 협력한 것이 야노스케다.

미쓰비시는 지난해 기준 기린맥주의 최대주주 목록에 이름은 없지만 태생 자체가 미쓰비시와 연관있는 기업이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일본뿐만 아니라 미쓰비시는 한국에도 법인을 설립해 기업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미쓰비시상사(일본 미쓰비시상사 지분 100%), 한국미쓰비시엘리베이터(일본 미쓰비시전기 지분 54%·미쓰비시전기빌딩테크노서비스 지분 26%·미쓰비시주식회사 지분 20%), 한국미쓰비시전기(일본 미쓰비시전기 지분 100%) 등이 대표적이다.

니콘과 기린맥주도 한국법인을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니콘이미징코리아(니콘 지분 100%), 니콘프레시전코리아(일본 니콘 지분 100%), 한국쿄와기린(일본 쿄와하코기린 지분 10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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