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원정희 기자]이제는 주인이 없는 텅빈 방. 옛 신아조선소 본관 건물 7층에 자리잡은 회장실에선 바다를 향한 두 면의 통유리 벽을 통해 신아조선소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분주하게 배가 건조되고 슬라이딩 도크에서 바다로 진수되는 모습을 바라봤을 터.
지금은 그저 바다를 바라보는 빈 도크와 하릴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골리앗 크레인 한대가 이날 추적추적 내리는 비만큼이나 우울한 모습을 연출했다. 통영 경제를 고스란히 투영하는 듯 했다. 이 폐조선소의 운명만큼이나 통영이란 도시도 제조업 측면에서는 쇠락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우울한 기운 속에서 에메랄드 빛 크레인은 유독 튀어 보였다. 폐조선소이기에 더 어색하게 느껴진다. 한때 세계 16위(수주잔량기준)에 오른 중형조선사의 저력과 당시 활력을 이곳에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 도시재생 프로젝트 조감도 (사진=LH) |
추석 연휴 전인 지난 20일 경남 통영 폐조선소인 신아조선소를 찾았다. 이날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통영 폐조선소 재생·복합단지 조성사업 설명회를 열고 글로벌 관광·문화허브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의 마스터플랜을 공개했다.
LH가 추진하는 통영 폐조선소 도시재생 사업은 지난해 국토부 도시재생 뉴딜사업중 유일한 경제기반형 사업으로 선정되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총 사업비 1조1000억원의 대규모 프로젝트다.
국제공모 당선작으로 선정된 '포스코에이앤씨(A&C) 컨소시엄'의 통영 '캠프 마레(CAMP MARE)'를 기본설계로 해 본격적인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된다.
▲ 옛 신아조선소 본관 7층 회장실에서 바라본 도장장과 조립장 등 모습.(사진=원정희 기자) |
◇ 왜 통영, 신아조선소 인가
처음 신아조선소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신아조선소 였을까라는 궁금증이 컸다. 통영뿐 아니라 울산, 거제 등도 조선업 경기가 고꾸라지면서 도시 경제도 함께 무너진 곳들이다. 궁긍즘은 이내 해결됐다.
통영 관광 중심지나 다름없는 해저터널 인근에서 신아조선소까지 차량으로 이동하는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신아조선소 바다 건너편에는 이미 유명 관광지인 동피랑 벽화마을, 통영항 여객선터미널 등이 자리잡고 있다. 신아조선소 인근에도 통영요트학교, 한려수도 조망케이블카, 김춘수 전시관 등이 둘러싸고 있다.
손순금 LH국책사업기획처장은 "대부분의 조선소들이 도심 중심지에서 떨어져 있는 반면 신아조선소는 도시 중심에 있어 입지, 접근성 면에서 관광지로 손색이 없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 곳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 등 400년 역사가 깃든 도시이자 빼어난 자연환경과 박경리, 김춘수, 윤이상 등 많은 문화예술인을 보유한 예술인의 도시라는 점 등 관광자원으로서의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점 등이 반영됐다.
박상우 LH사장도 "바다와 아름다운 자연, 박경리 선생으로 대표되는 문화 자원이 보물처럼 축적된 지역"이라며 "이런 지역에 조선소 프로젝트가 화룡점정을 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LH는 지난 3년간 버려진 이 조선소를 지난 3월 680억원에 매입했다. 부지 면적만 4만4000평에 달한다. 7월엔 경상남도-통영시-LH가 사업추진 협약을 체결하면서 프로젝트를 본격화하고 있다.
▲ 신아조선소 전경(사진=LH) |
◇ 조선소의 드라마틱한 운명처럼, 통영의 랜드마크 재탄생
신아조선소는 어떻게 탈바꿈할까. 국제공모 당선작을 내놓은 포스코A&C 황상희 대표는 "말뫼의 눈물이 아닌 통영의 웃음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자신감을 내보이기도 했다.
LH는 이 부지에 창업지원센터, 신산업 문화복합시설, 수변휴양시설, 상업 및 관광숙박시설 등을 계획하고 있다. 흉물이었던 폐조선소를 통영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폐조선소와 함께 경기가 침체되면서 빈집이 발생한 배후 주거지 역시 도시재생을 통해 재탄생할 전망이다.
▲ 토지이용구상(사진=LH) |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신아조선소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골리앗 크레인이다. 스페인의 항구도시이자 조선업 성장을 이끈 말뫼의 상징이었던 골리앗 크레인은 단독 1달러에 (현대중공업에) 팔렸다. 이렇게 시작한 '말뫼의 눈물'은 조선업 쇠락의 상징이 됐다.
'통영의 눈물'과도 같은 에메랄드빛 골리앗 크레인이 황 대표 말마따나 통영의 웃음으로 거듭나기 위해 더욱 공을 들인 흔적도 역력했다.
54m, 아파트 17층 높이의 이 크레인은 다양한 이벤트 공간으로 변모한다. 조희 포스코A&C 팀장은 "골리앗 크레인과 슬라이딩 도크는 수변공간으로 이어지는 도시재생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골리앗 크레인과 함께 아래의 슬라이딩 도크는 본래의 기능과 형태를 그대로 되살린 인공적인 조형물로 보존한다.
슬라이딩 도크 하단은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상부는 옥상광장 등 야외 이벤트 공간으로 거듭난다. 골리앗 크레인을 활용해 대형 스크린을 걸어 공연이나 영화관으로도 활용한다. 슬라이딩 도크와 바다가 연결된 곳엔 수영장이 들어선다.
오홍택 LH국책사업기획처 차장은 "공모 후보작들 중에선 (크레인을) 번지점프대로 활용하거나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유리큐브를 크레인이 들어올리면서 전망대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들이 나왔다"면서 "일반인 아이디어 공모에서도 스카이 전망대 등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나오면 반영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옛 신아조선소 본관 7층 회장실에서 유리창 너머로 바라본 조선소의 골리앗 크레인과 슬라이딩도크 전경(사진=원정희 기자) |
◇ 배만들기, 나전칠기 등 12개 콘텐츠로 통영만의 매력 발산
골리앗 크레인이 이곳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라면 '12개의 교육프로그램(학교)'은 1년내내 관광객과 교육생을 끌어모아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을 핵심 콘텐츠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진상품을 만들던 통영의 '12공방'을 모티브로 했다.
배만들기학교, 통영예술중개소, 통영장인공방학교, 통영음악학교, 남해안여행학교, 관광창업학교, 바다요리학교, 섬식물식생학교 등이다. 누비나 나전칠기 등 통영의 전통공예와 배만들기를 비롯해 여행작가가 될 수 있는 프로그램 등 통영만의 특색을 살린 다양한 프로그램을 아우른다.
캠프마레가 유독 외국인 심사위원 3명으로부터 만점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손순금 처장은 귀띔했다. 손 처장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앵커시설이 아니라 통영만의 전통 손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콘텐츠를 담고 있는 데서 외국인 심사위원들이 높은 점수를 줬다"고 부연했다.
오홍택 차장도 "이런 교육프로그램이 있으면 해당 과정 동안 체류하게 된다"며 "성수기에 부하를 거는게 아니라 일년 상시 전국적인 교육생을 흡수하겠다는 것"이라고도 설명했다. 이것이 곧 취업과 창업, 일자리의 공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다.
이런 계획은 최근 여행 트렌드와도 맞닿아 있다. 여행객들은 요가를 배우기 위해 인도에 몇달을 머문다. 아르헨티나에 가선 탱고를 배우고 베트남에 가선 베트남 요리를 배우느라 기꺼이 돈과 시간을 할애한다. 보는 것보다 경험하는 것이 여행의 가치가 된지 오래다.
'캠프마레'안에 휴양 주거공간을 마련하고, 배후 주거지의 빈집을 활용해 숙박시설로 활용하는 계획 역시 이와 연계돼 있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가 경제기반형으로 선정된 이유도 마찬가지다.
통영의 조선업이 무너지면서 지역 살림을 그나마 관광산업으로 메우고 있다지만 이날 행사 뒤에 찾은 동피랑 마을에선 관광객을 구경할 수 없었다. 평일의 비오는 날씨이긴 했지만 대부분 카페도 주말에만 문을 여는 듯 모두 잠겨 있었다. 주말에 잠시 하루 이틀 머무는 관광지로서는 통영을 되살리는 데는 힘에 부쳐 보인다. 12개 프로그램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캠프 마레는 올해 연말 본관 등 기존 건물을 재활용한 창업지원시설의 리모델링 공사에 착공한다. 재생복합사업은 오는 2020년 하반기 착공해 2023년에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앞으로 5년이면 제 모습을 드러낼 전망이다. 골리앗 크레인에서 번지점프를 하고 인피니티풀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수영도 할 수 있다. 배만들기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하고, 공방에서 쇼핑도 할 수 있다. 가족들과 함께 내려와 추억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때는 서울에서 버스로 4시간 10분을 달릴게 아니라 KTX를 이용해 3시간만에 닿을 수 있는 곳이기를 역시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