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소재들을 다룹니다. 먹고 입고 거주하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우리 곁에 늘 있지만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들에 대해 그 뒷이야기들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보려 합니다. [생활의 발견]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여러분들은 어느새 인싸가 돼 있으실 겁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 [편집자]
제 노래방 18번은 임창정의 '소주 한 잔'입니다. (물론 잘 부르진 못합니다) 연말 술자리 모임이 속속 생기는 요즘인데요. 이 노래만큼 소주를 맛깔나게 하는 노래도 없을 겁니다. 완곡하고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으면 감동이 배가 됩니다. 지나간 사랑에 눈물(?)이 납니다. 곡명이 왜 소주 한 잔인지 느낄 수 있죠. 그래서 '불후의 명곡'으로 꼽히는 모양입니다. 임창정은 제게 '진리'입니다.
사견이 길었습니다. 무튼 노래도 노래지만 '소주 한 잔'은 그 특유의 감성이 있습니다. 종이컵 등 다른 잔에 마시면 그 맛이 안 삽니다. 소주잔만의 '정량'이 있습니다. 목 넘김에 딱 알맞은 한 모금이 나옵니다. 소주잔에 마시면 왠지 술이 더 잘 넘어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들 이 '소주잔 효과'를 한 번쯤 느껴 보셨을 겁니다. 빠르게 목구멍으로 떨어지는 '묵직함'이 있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 모든 걸 잊을 수 있죠. 소주 한 잔에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겼다고도 하는 이유일 겁니다.
문득 궁금했습니다. 이 소주 한 잔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소주잔은 원래부터 이런 형태였을까. 너무 당연히 생각했습니다. 평소 쉽게 접하는 것이니까요. 보통 소주잔의 용량은 50㎖입니다. 30대 중반인 제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소주잔은 변함이 없었죠. 관련해 '소주의 대명사' 하이트진로와 롯데칠성을 통해 알아봤습니다. 각각 '참이슬', '처음처럼'이라는 스테디셀러를 배출한 곳이죠.
알아보니 소주잔의 역사는 생각보다 깊었습니다. 일단 소주의 역사부터 살펴야 합니다. 이는 과거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몽골의 침략이 있었던 시절이죠. 당시 몽골은 중동 정복 등으로 증류주 제조 기술이 남달랐습니다. 이 몽골에 의해 '소줏고리' 도입 등 국내 소주 제조법이 발전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소줏고리는 술을 증류해 소주를 만들 때는 쓰는 옹기입니다. 소주는 곡류 등을 원료로 술의 발효를 거쳐 만들어진 '술밑'을 끓여 걸러낸 술입니다.
이처럼 소주는 당시 제조가 쉽지 않던 술입니다. 귀한 데다가 매우 독했습니다. 이 때문에 고급주·약용으로 사용했습니다. 소주잔이 태초부터 작았던 이유입니다. 이후 소주잔이 역사서에 공식 등장한 것은 조선 시대입니다. 실학자 이수광 선생이 편찬한 『지봉유설 芝峰類說』에 첫 언급됩니다. '지봉유설'을 조선 시대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 선생은 '소주가 약용으로 쓰여 많이 마시지 않고 작은 잔에 마셨다'며 '그래서 작은 잔을 소주잔이라고 부른다'고 썼습니다.
소주가 국민 술로 발전한 것은 1960~7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입니다. 기존 '증류식 소주'가 아닌 '희석식 소주'의 생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입니다. 우리가 평소 마시는 참이슬, 처음처럼이 대표적입니다. 1980년대 아시안게임과 서울 올림픽과 맞물려 소주 판매량은 급증하기 시작합니다. 화이트칼라의 등장으로 회식도 잦아졌죠. 음식점 주류 납품을 위한 주류 업체들의 경쟁도 치열했습니다. 업체들이 식당에 규격화된 소주잔을 같이 얹어주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이 당시 생겨난 대표 주류 문화가 바로 '원샷'입니다. '짠!' 한 번에 소주잔을 다 비우는 것이 '국룰'이 됐습니다. '밑 잔'을 남기는 것은 주도(?)에 어긋난다는 인식도 생겼죠. 이런 문화는 소주잔의 형태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초기 소주잔의 몸체는 살짝 둥근 형태의 종지와 같았습니다. 이 소주잔이 60~70년대부터 점점 곧게 펴지기 시작해 지금의 '직선 몸체'를 갖추게 됩니다. 목 넘김을 최대한 좋게 만들려는 디자인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원샷'을 하기 편하기니까요.
좀 더 살펴볼까요. 실제로 직선 몸체는 소주를 목구멍 방향으로 바로 떨어지게 해줍니다. 반대로 와인잔 같은 경우는 술잔의 입구가 넓습니다. 혀 양쪽에 술이 떨어지면서 넓게 펴집니다. 소주는 와인처럼 입안에 머금고 음미하는 술이 아니죠. 입안에 머무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소주를 와인잔에 먹는다면 거부감이 상당할 겁니다. 이것이 바로 소주잔에 담긴 '소주 한 잔'의 원리입니다.
현재 주류 업계는 저도수 소주를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이 역시 목 넘김과 연관이 많습니다. 풍미는 유지하면서 거부감이 적도록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2018년 17도까지 내려갔던 알코올 도수는 최근 '처음처럼 새로'가 등장하면서 16도까지 내려갔습니다. 일각에서는 최근 소주잔의 영향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젠 소주를 아예 여러 술과 섞어 먹기 시작했으니까요. 소토닉(소주+토닉워터) 열풍이 대표적입니다. 앞으로 술잔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지네요.
지금까지 소주 한 잔으로 풀어본 소주잔의 비밀이었습니다. 지난주 이태원 참사라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혹여나 애도 분위기에 걸맞지 않은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닌지 한 편으로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그저 하나의 지식 전달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아보니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곧 연말입니다. 친구, 연인, 동료들과 소주 한 잔 기울이면서 남은 한해 잘 마무리하시길 기원합니다. 아, 물론 과도한 음주는 자제하면서 건강도 챙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