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시작된 CJ제일제당과 쿠팡의 '납품가 전쟁'이 장기화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신세계, 네이버, 컬리 등 쿠팡의 경쟁 채널들과 잇따라 손을 잡으며 활로를 찾았다. 쿠팡도 햇반, 스팸을 대체할 제품은 시장에 많다며 아쉬울 게 없다는 눈치다.
너 없이도 잘 살아
CJ제일제당은 지난 8일 SSG닷컴과 이마트, G마켓 등 신세계 계열 유통 3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공동 상품 개발에 나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주요 제품인 만두와 국물요리, 밀키트 등의 신제품을 개발하고 신세계 유통사에 가장 먼저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CJ제일제당은 컬리와도 손잡았다. 가공식품과 HMR 등의 제품을 공동 개발하고 '컬리 온리' 제품을 선보인다. 컬리는 쿠팡과 함께 대규모 새벽배송 물류망을 구축한 몇 되지 않는 기업이다.
컬리로 채우지 못하는 빈 칸은 네이버로 메웠다. 네이버가 운영하는 '도착보장 전문관'에 입점하며 로켓배송의 아쉬움을 달랜 것이다. 네이버의 도착보장 서비스는 밤 12시 이전 주문 건은 익일 배송해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오후 주문건이라면 쿠팡의 로켓배송과 크게 다르지 않다.
11번가와 티몬, 위메프 등 이외 다른 이커머스도 활용하고 있다. 쿠팡과의 분쟁 직후 CJ제일제당 특별전을 열고 햇반과 스팸 등을 특가 판매하는 등 그간 쿠팡이 판매했던 물량을 소화시키고 있다.
대기업 빠지니 중소기업 '대박'
쿠팡도 CJ제일제당의 이탈이 아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쿠팡에 와서 즉석밥이나 만두를 사려는 소비자는 굳이 '햇반'이나 '비비고'가 아니어도 저렴하고 품질이 좋은 제품을 골라 구매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시장의 독과점 기업이었던 CJ제일제당이 빠져나감으로써 중소·중견기업 제품이 더 잘 팔리는 효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쿠팡에 따르면 올해 5월까지 즉석밥 부문 성장률 상위권 1~5위는 모두 중소·중견기업의 차지였다.
'밥대신 곤약 75㎉' 제품을 판매하는 유피씨는 이 기간 매출이 전년 대비 100배 이상 늘었고 쿠팡의 PB 제품인 곰곰 즉석밥과 자체 제품 '우리집밥'을 만드는 시아스는 70배 넘게 늘었다. 참미푸드와 티엘푸드, 미트리 등 중견 기업들의 즉석밥도 170~1000%대 성장률을 기록했다. '더미식밥'을 만드는 하림과 '오뚜기밥'의 오뚜기도 70~1000%대 성장률로 햇반의 공백을 메웠다.
쿠팡 측은 "쿠팡에서 독과점 수준의 시장점유율을 앞세운 대기업이 사라지면서 중소 중견기업들의 가성비 경쟁이 치열해졌고, 이에 따라 소비자 유입과 구매도 늘어나게 됐다"고 분석했다.
그렇다고 소비자들이 쿠팡에서 햇반이나 스팸 등을 구매하지 못하게 된 것도 아니다. 로켓배송은 제공하지 않지만 판매자가 직접 배송하는 상품으로는 쿠팡에서 해당 제품들의 구매가 가능하다. CJ제일제당도 쿠팡에서 직접 판매자배송 상품으로 햇반 등을 판매하고 있다. 아직도 햇반은 쿠팡 즉석밥 카테고리에서 판매량 기준 20위권 내에 올라 있다.
돌아오지 못할 강
업계에서는 납품가 분쟁 이후 완전히 갈라선 쿠팡과 LG생활건강의 사례가 이번에도 반복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쿠팡과 CJ제일제당이 각자 활로를 찾는 데 성공하면서 먼저 굽히고 들어갈 이유가 사라졌다는 판단이다.
특히 최근 들어 양 사의 행보를 보면 사실상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최은석 CJ제일제당 대표는 지난 8일 '신세계 유니버스' 론칭 행사에 참여했다. 쿠팡의 가장 직접적인 경쟁자가 이마트인 만큼 최 대표의 등장에 의미를 부여하는 업계인이 많았다.
쿠팡은 지난 11일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대기업에 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중소, 중견 기업들이 공정한 판매 환경에서 고객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쿠팡이 버팀목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즉석밥, 국탕찌개, 냉동만두 등을 언급한 만큼 사실상 CJ제일제당을 공개저격했다는 평가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아예 제품이 판매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오픈마켓 상품으로는 판매되고 있어 양 사 모두 절박한 입장은 아니다"라며 "먼저 굽히는 입장을 취하면 다른 기업들과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