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에게도 복지를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한 강연에서 "인류 문명의 시작은 부러졌다가 회복된 흔적이 있는 넙적다리뼈"라고 말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동료를 버리지 않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문명이라는 의미다. 비슷한 이야기로, 한 사회의 문명화 수준을 파악하려면 그 사회가 약자를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보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 등장한 '동물 복지'라는 용어는 우리 인류 사회가 한 걸음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는 지점을 나타내는 용어이기도 하다.
우리 곁에서도 동물 복지가 바꾼 풍경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배터리 케이지(battery cage)'에서 기르는 닭의 열악한 환경이 여러 차례 알려지면서다. 평생 A4용지 1장 넓이의 케이지에 갇혀 사는 닭은 죽을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알만 낳는다. 날지 못하게 닭의 날개를 자르기도 한다. 고문에 가까운 사육이다.
이 때문에 웬만한 대형마트에서는 자연방목한 닭이 낳은 계란을 의미하는 난각번호 '1번 계란'이나 케이지를 사용하지 않는 평사에 살고 있는 닭이 낳은 '2번 계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물복지에 더 민감한 유럽연합(EU)에서는 배터리 케이지를 이용한 닭 사육이 금지됐다.
하지만 1번이 새겨진 계란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간 우리가 먹던 계란보다 서너배 이상 비싸서다. 겉으로 보기엔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계란인데 앞자릿수가 다른 가격표를 붙이니 웬만해선 집어들기가 쉽지 않다. 비싼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동물복지와 자유방목이라는 모호한 문구만으로는 지갑이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직접 그 이유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지난 26일 제주도에서 '구엄닭'을 기르는 '애월아빠들'을 찾았다.
컬리가 인정한 '희소가치'
컬리는 지난 2022년 품종과 생산환경, 생산과정이 특별한 식재료를 발굴·소개하는 '희소가치 프로젝트'를 론칭했다. '구엄닭 계란'도 이 희소가치 프로젝트에 선정된 제품이다. 이름에 '희소'가 붙은 만큼 가격은 만만치 않다. 난각번호 1번인 유정란 10구가 1만5390원이다. 계란 한 개에 1500원이 넘는 셈이다. 그나마 컬리가 컬리멤버스 가입 고객 전용으로 준비한 컬리멤버스 특가몰에서는 10% 할인이 적용돼 1만3851원에 구매할 수 있었다. 쿠팡의 PB인 곰곰 1번란이 1구당 500~600원꼴임을 감안하면 3배 가까운 값이다. 비싼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다.
구엄닭은 제주도의 유일한 재래닭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육계가 30일이면 성체가 되는 것과 달리 10개월 이상을 키워야 온전히 자란 닭이 된다. 덩치도 작다. 30일령 육계가 1.5㎏ 이상 나가는 반면 구엄닭은 10개월이 지나도 1~1.2㎏ 안팎이다. 알도 적게 낳는다. 일반 산란계의 일 수율이 90% 이상인 반면 구엄닭은 30~35% 안팎이다. 암탉 한 마리가 사흘에 하나 꼴로 계란을 낳는 셈이다. 경제 논리로만 보면 일반 산란계를 당해낼 수 없다. 구엄닭 계란이 비싼 첫 번째 이유다.
단순히 수율이 떨어지는 게 비싼 이유라면, 그저 비싸기만 한 계란이 팔릴 리가 없다. 애월아빠들이 생산하는 구엄닭 계란은 전부 난각번호 1번과 2번으로, 동물복지 타이틀을 달 수 있는 '프리미엄 계란'이다. 이날 방문한 구엄농장은 1번란을 생산하는 방사형 농장이다. 닭 한 마리당 1.1㎡의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4번란의 경우 같은 공간에 20마리의 닭이 산다. 주거 격차가 크다.
구엄농장에서 가장 놀라웠던 건 일반적인 양계장에서 맡을 수 있는 지독한 계분(鷄糞)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넓은 풀밭은 물론 실내 사육장 내에서도 불쾌한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양계장이 더러울 것이라는 편견은 깨지는 순간이었다.
유전자 조작을 하지 않은 Non-GMO사료에 솔잎, 물고기 액젓을 섞어 발효시킨 사료를 급여해 소화흡수율을 높였다는 설명이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알을 낳고, 품질 높은 사료를 먹는다. 낮에는 풀밭에 나가 날아다니며 벌레를 잡는다. 자연스럽게 운동량이 늘고 튼튼해진다. 건강한 닭이 낳은 계란의 품질이 나쁠 수 없다. 비싼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한 개 1500원 계란 맛은
구엄닭이 갓 낳은 계란은 작고 따뜻했다. 일반적으로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계란은 52~60g인 대란부터 60~68g의 특란, 68g 이상인 왕란으로 구분된다. 구엄닭은 크기가 작은 만큼 계란도 52g 미만의 소란~중란이 많다. 작은 고추는 맵다던데, 작은 계란도 맛이 진할까.
이날 만난 윤성재 애월아빠들 이사는 "구엄닭 계란은 갈색이거나 흰색인 일반 계란과 달리 옅은 아이보리색이고 껍질이 얇은 게 특징"이라며 "노른자 맛이 진하고 비린내가 없어 날계란으로 먹거나 구워 먹으면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계장 방문 후 컬리에서 직접 구엄닭 계란을 구매해 봤다. 컬리에서는 매일 100여 케이스의 구엄닭 1번란을 들여 온다. 아차 하면 이미 품절 표시가 뜬다. 이날은 다행히 곧바로 주문에 성공했다. 다음날, 사흘 전에 낳은 계란이 도착했다. 10구 380g으로 소란에 속하는 작은 계란이었다. 최근 구매한 중란보다는 30% 가까이 가볍다.
특유의 비린내와 식감 때문에 생계란을 즐기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먼저 생으로 노른자를 먹어 봤다. 일반적인 노른자의 미끄덩한 느낌이 아니라 반숙 계란을 먹는 듯한 진하고 꾸덕한 식감이 느껴졌다. 비린내도 전혀 나지 않았다. 이정도면 날계란을 먹는 게 크게 부담되지 않을 수준이다. 프라이를 해 빵에 얹어 먹어도 진한 맛이 일품이다.
인간이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행위를 한다면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이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건강하게 자란 닭이 낳은 건강한 계란을 찾는 건 단순히 '맛있는 계란'을 찾는 행위가 아니다. 이번에 발견한 구엄닭에는 동물복지의 가치와 사라져가는 재래닭 복원이라는 가치가 함께 담겨 있다. 계란 하나에 인류의 문명이 담겼다면 과장이겠지만, 인류 문명이 나아갈 길을 계란 하나로 보여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