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물 복지
'래칫 효과(ratchet effect)'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래칫'은 역회전 방지 톱니바퀴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 일이 발생하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의미다. 경제학 용어로 쓰일 때는 소득 수준이 높아진 사람이 소비를 늘린 후 다시 소득이 줄더라도 소비를 줄이기 어려워진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된다.
최근 유행하는 소비 용어 중 하나인 '가치 소비'는 이 래칫 효과가 잘 적용되는 카테고리다. 가치소비는 소비자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충족시켜주는 상품을 선택해 소비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가격이 다소 비싸더라도 친환경 제품을 구입하거나 동물실험을 하지 않은 제품을 선택하는 게 대표적이다. 한 번 나의 가치에 부합하는 제품을 사기 시작하면 그 전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불황 속에서도 식품업계가 친환경과 비건, 동물복지 등의 가치를 놓지 못하는 이유다.

그 중에도 동물복지 제품은 최근 몇 년 새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달걀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정보는 무게였다. 그 다음으로는 산란일자를 보기 시작했다. 가치의 중심이 '양'에서 '신선도'로 옮겨갔다. 최근엔 난각번호가 가장 중요한 정보 중 하나다. 닭들이 얼마나 건강하게 자랐는지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올라섰다. 자유방목해 기르는 '난각번호 1번'란은 일반 4번란에 비해 4~5배 이상 비싸지만 1번란만을 찾는 소비자는 점점 늘고 있다.
자유롭게 놓아 기르는 게 좋은 동물이 닭 뿐일리 없다. 다만 크기가 작은 닭에 비해 돼지나 소는 넓은 땅이 필요하다. 뉴질랜드나 서유럽이면 모를까 좁은 국내에선 쉽지 않은 시도다. '자유방목 계란'은 있어도 '자유방목 우유'는 어색한 이유다. 실제로 국내에서 자유방목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젖소 목장은 단 하나 뿐이다. 제주도에 있는 '아침미소목장'이다. 지난달 31일 아침미소목장을 방문해 동물복지의 가치에 대해 들어봤다.
덕질을 하려면 이렇게
아침미소목장은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젖소를 기르기 시작한 유서 깊은 목장이다. 1975년 8마리의 젖소를 들여와 시작한 게 어느덧 50년이 됐다. 현재 목장을 운영하는 이성철 대표와 양혜숙 대표는 2대째다. 아들인 이원신 이사가 3대째 목장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족에겐 공통점이 있다. 소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소 덕후'라는 점이다.
아침미소목장에 방문해 소들을 둘러보면서 가장 눈에 띈 건 다른 젖소 목장에서 보기 힘든 '붉은 얼룩 젖소'였다. '흑백 얼룩'이 특징인 홀스타인 품종에서 유전적 차이로 모색(毛色)이 다르게 발현되는 '레드 홀스타인'이다. 우유를 더 많이 생산하거나 고품질 우유를 만드는 품종일까 싶어 물어봤지만 이성철 대표의 대답은 "예쁘잖아요"였다. 소를 가축이 아닌 반려동물로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 때문에 8만평이 넘는 아침미소목장의 젖소 사육 두수는 100마리가 채 되지 않는다. 농림축산검역본부에 따르면 자유방목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소 한 마리당 337㎡의 면적이 필요하다. 자유방목 기준만 맞추려 했다면 780여 마리를 기를 수 있는 넓이지만 직접 기른 풀로 먹일 수 있을 만큼만 기르겠다는 의지의 결과다.
소가 먹는 풀 역시 아무 들풀이나 뜯어 먹이는 게 아니다. 국내에서는 재배가 되지 않는 알파파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풀을 직접 길러 먹인다. 당연히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 풀이다. 사료를 많이 먹은 소가 만드는 우유에선 비린내가 나지만 풀을 많이 먹은 소의 우유는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다보니 여러 목장의 원유를 섞어 판매하는 다른 대기업 우유와 달리 자연미소 목장의 원유는 '단일 목장 원유'다. 이 대표가 추구하는 우유의 개성을 정확히 구현할 수 있다. 위스키로 치면 싱글 몰트 위스키인 셈이다.

양혜숙 대표 역시 남편 못지 않은 '소 사랑'을 수차례 드러냈다. 그는 "행복하게 사는 소가 건강하고 맛있는 우유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모든 생명이 주어진 만큼의 삶을 다 살고 가야 한다는 이야기도 반복했다. 프리미엄 우유를 만들기 위해서도, 인증을 받고 싶어서도 아닌 내가 기르는 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유방목을 결정한 셈이다.
한때 아침미소목장은 국내 톱 수준의 착유량을 자랑하던 목장이었다. 벌이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양 대표는 언젠가부터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들판에서 풀을 뜯어먹고 자라는 젖소는 평균 12년을 산다. 그러나 착유량을 늘리기 위해 곡물사료를 먹이고 좁은 우리에 모여 사는 젖소는 평균 5년을 넘기기 힘들다. 질병도 많아진다.
소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원유의 품질 기준인 체세포수와 세균수가 바로 늘어난다. 저품질 우유가 된다는 의미다. 소가 행복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면 소도 더 좋은 우유를 만들어 준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원유 1㎖당 체세포 수가 20만개 이하, 세균 수 3만개 이하여야 '1a'등급을 받는다. 아침미소목장 원유의 체세포 수는 5만개 이하다. 이른바 '덕질의 선순환'이다.
가업 3대째
나라와 기업은 비슷한 점이 많다. 초대는 규모와 관계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공이 있다. 2대는 그 기틀을 갈고닦아 안정적인 국가 혹은 사업을 구축한다. 3대의 의무는 대개 혁신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만들고 가꾼 틀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하는 의무를 안고 있다. 아침미소목장의 3대인 이원신 총괄이사도 마찬가지다.
이 이사가 목장의 경영에 참여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예약제로 운영되던 목장 체험을 자유 방문으로 바꾼 것이다. 제주를 찾은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목장을 방문해 '우유'라는 콘텐츠를 소비하길 바라서다. 단순히 품질이 좋은 우유를 만드는 것을 넘어 젖소를 기르고 우유를 생산하고 요거트와 치즈 등으로 바꾸는 이 모든 과정을 하나의 가치소비 콘텐츠로 키워내고 싶다는 마음가짐이다.

최근 진행하고 있는 초록마을과의 협업 역시 이런 마음이 반영됐다. 아침미소목장은 현재 초록마을 PB로 무가당 그릭 요거트를 판매 중이다. 주 2회 한정 수량으로만 들여오는데 제품을 구경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기 품절되는 경우가 많다. 이달부터는 초록마을의 모기업인 정육각에서도 제품을 판매한다. 착유 2시간 내에 제품 생산을 시작하는 아침미소목장과 정육각의 초신선 콘셉트가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이 이사는 "사양산업인 낙농업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동물복지 같은 가치를 알리는 길"이라며 "초록마을이 추구하는 가치와 우리의 가치가 부합해 손을 잡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초록마을과의 협업으로 새로운 사례를 만들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목장에서도 사례를 쌓아간다면 우리 낙농산업이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침미소목장을 낙농업계의 오설록과 같은 브랜드로 육성하는 것이 목표다. 단순히 상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게 아닌, 고객들에게 경험을 판매하고 이를 바탕으로 낙농업에 대한 관심을 늘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미 홍콩과 싱가포르 등에 일부 제품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 이사는 "우유로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확대해 보고 싶다"며 "여러 시도를 통해 아침미소목장을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낙농 브랜드로 키워내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