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이 2% 안팎의 연이율로 퇴직연금 재원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저축은행 입장에선 수신 금액이 많아지니 대출 여력이 커져 수익을 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퇴직연금 시장 전체로 보면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저축은행 예금상품에 자금이 몰린 것은 원리금을 잃지 않기 위해 낮은 수익률을 감내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수익률로는 퇴직연금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입니다.
◇ 퇴직연금 빨아들이는 저축은행
저축은행 업계 자산규모 2위 OK저축은행은 최근 퇴직연금 정기예금 보유 잔액이 2조원을 돌파했다고 밝혔습니다. 잔액이 1조원을 넘은 게 지난 2월 말이었으니 9개월 만에 1조원을 끌어 모은 겁니다. 금융위원회가 저축은행 예·적금 상품도 퇴직연금 상품군에 포함할 수 있도록 감독규정을 바꾸고 OK저축은행이 퇴직연금 시장에 뛰어든 것이 2018년 11월이니까 정확히 2년 만에 2조원을 쓸어 담은 것이기도 합니다.
OK저축은행이 짧은 시간에 거액의 재원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퇴직연금 시장 전체를 살펴봐야 합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말 퇴직연금 적립금을 약 221조원으로 집계했는데요. 이 중 89.6%에 해당하는 198조원이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됐습니다. 퇴직연금 가입자 대부분이 은행 예·적금과 국공채, 저축보험 등과 같이 원금 손실 우려가 없는 상품을 찾았다는 의미입니다.
저축은행 퇴직연금 정기예금도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하나입니다. OK저축은행의 퇴직연금 정기예금 가입기간 1년 DC(확정기여)·IRP(개인형퇴직연금)형 상품의 연이율은 2.0%입니다. 연이율이 2% 안팎으로 설정된 여타 저축은행 퇴직연금 정기예금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DC·IRP형 상품은 금융기관 당 최대 5000만원까지 예금자보호제도가 적용됩니다. 시중은행 퇴직연금 정기예금 연이율은 대부분 1% 안팎 수준이라 경쟁력은 충분해 보입니다.
저축은행 퇴직연금 정기예금은 은행과 증권사, 보험사 등과 같은 퇴직연금 사업자를 통해 가입할 수 있습니다. 가입자가 사업자에 돈을 맡기고 어떤 자산을 통해 굴릴지 선택하면 사업자는 그 자산을 굴리는 금융사에 돈을 다시 맡기는 구조인 것이죠. 저축은행은 정기예금이라는 상품을 사업자 측에 자산으로 선보인 겁니다. 정기예금은 정해진 기간 동안 돈을 맡기면 그에 맞는 이자를 타는 상품입니다.
저축은행 입장에서는 퇴직연금 정기예금 잔액이 불어난다는 것은 이자로 제공하는 비용이 그만큼 커진다는 의미이지만, 저축은행이 정해진 기간 동안 마음대로 굴릴 수 있는 자금이 많아져 사업 보폭이 커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축은행 대부분은 정기예금으로 들어온 자금을 저신용자나 중소기업 대출 등으로 돌려 예대마진을 취득합니다. 일부는 펀드와 주식 등 투자 활동을 통해 추가 수익을 내기도 합니다.
단점도 있습니다. 퇴직연금 정기예금은 고정금리로 출시되는데 저금리 기조가 이어져 시장금리가 계속 떨어질 경우 여력에 비해 높은 비용을 부담해야 해서 재정 부담이 커질 수 있습니다. 저축은행 업계 관계자는 "수신이 많아지면 그만큼 비용이 나가기 때문에 여신도 함께 늘어날 수밖에 없어 세밀한 관리가 필수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저축은행중앙회에 따르면 올해 9월 말 업계 전체 퇴직연금 잔액은 10조2200억원입니다.
◇ 마냥 박수칠 일은 아니다
저축은행 입장이 아니라 퇴직연금 시장 전체로 보면 얘기는 어떻게 바뀔까요.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221조원 규모 퇴직연금 연간수익률은 2.3%를 기록했습니다. 상품별로 나눠서 살펴보면 원리금보장형 상품과 실적배당형 상품의 연간수익률이 각각 1.8%, 6.4%이었습니다. 덩치가 큰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수익률이 작은 덩치의 실적배당형 상품의 수익률을 희석시켰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퇴직연금 제도는 기존의 퇴직금 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2005년 도입됐습니다. 퇴직금 제도는 근로자 퇴직 시점을 기준으로 최근 세달치 월급분을 퇴직금으로 제공합니다. 임금상승률이 높을수록 퇴직금 규모도 불어나는 구조입니다. 지난해 임금인상률은 3.9%였습니다. 근로자 입장에서 보면 퇴직연금 연간수익률이 임금인상률을 밑돌아 퇴직연금을 도입한 것이 오히려 복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문제가 생깁니다.
국민연금은 고갈 우려에 시달리고 있고 개인연금도 저금리 기조 여파에 수익률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국민연금, 개인연금과 함께 3층 연금체계를 이루는 퇴직연금이 주목받는 이유입니다. 지난해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순차적으로 퇴직연금 제도를 의무적으로 도입하게 한 터라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나날이 커져 2027년이 되면 적립금 규모가 380조원 수준으로 불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그러다보니 규모와 달리 운용은 별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경희대 성주호 교수는 과거 비즈니스워치와 인터뷰하면서 중위 계층 소득대체율이 64%는 돼야 한다고 분석했습니다. 퇴직 직전에 100만원을 벌었다면 퇴직 이후에는 퇴직연금과 국민연금, 개인연금을 모두 합쳐 64만원은 받아야 퇴직 전과 비슷하게 살 수 있을 것이란 설명이었습니다. 현재 이런저런 수익률을 감안하면 소득대체율은 60%에 못미칩니다.
이에 따라 성 교수는 퇴직연금 연간수익률 목표치를 7% 이상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말은 현재 2%에도 채 못미치는 원리금보장형 상품 수익률로는 제대로 된 복지 시스템을 꾸리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성 교수는 "다양한 펀드와 세액공제 등으로 자산을 효율적으로 축적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연이율 2% 수준의 예적금으로 221조원 퇴직연금을 굴리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운용업계 전문가 의견과 같은 맥락입니다.
물론 저축은행 퇴직연금 정기예금 상품이 없었다면 지난해 원리금보장형 연간수익률은 더 낮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축은행의 역할이 작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축은행에 퇴직연금 재원이 쏠리는 지금의 현상을 보고 마냥 박수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퇴직연금 제도 도입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목표를 어떻게 하면 잘 달성할 수 있을지 업계의 고민이 깊어져야 할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