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은행(이하 SVB)이 파산을 선언하면서 금융시장 불확실성이 커진 가운데 금융당국이 추진하고 있는 '특화은행'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실리콘밸리은행이 파산하게 됐던 이유중 하나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핵심영역에 집중한 영향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따라서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기 힘든 '특화은행'이 도입되면 국내에서도 이와 같은 사례가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
40년 전통의 SVB, 왜 무너졌나
지난 10일(현지시각) SVB 본점의 소재지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은 SVB의 폐쇄를 결정했다. SVB가 충분한 유동성을 보유하지 못하면서 예금자의 예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지급불능 사태가 됐다는 이유에서다.
SVB는 미국 벤처기업의 '산파'나 다름없었다. 미국내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을 핵심 고객으로 삼아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업금융을 핵심 사업영역으로 삼았다.
SVB의 모기업인 SVB 파이낸셜 그룹은 지난해말 기준 미국내 약 44%의 벤처, 스타트업 등이 SVB의 고객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 기준 2090억달러(271조원)의 자산을 기록하며 미국내 16위 은행 자리를 확보한 바 있다.
그간 SVB의 핵심 사업을 살펴보면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에 직접 대출하거나 이들에게 투자하고자 하는 VC(벤처캐피탈)에게 대출을 해줬다.
특히 미국의 벤처 혹은 스타트업을 향한 투자금액은 우리나라와 달리 천문학적인 수준의 금액이 오고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들은 투자받은 금액 대비 지출이 적었고 이는 고스란히 SVB의 수신으로 이어졌다.
SVB 수신고객은 대부분 SVB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자금을 수혈받았기 때문에 투자금을 예금으로 예치하더라도 이자가 0%에 가까운 '무이자 예금'을 기꺼이 감내했다. 실제 지난 2021년 기준 SVB의 예금중 63%가 무이자 예금으로 분류될 정도였다.
같은기간 JP모건, 웰스파고,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미국의 주요 상업은행의 무이자 예금 비중이 30%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수신고 확대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던 것이다.
이는 SVB의 예금과 대출잔액에서도 나타난다. 지난해 기준 SVB의 예금규모는 1731억달러에 달했지만 취급한 대출규모는 743억달러로 집계됐다.
일반적인 은행이라면 예금과 대출의 비율을 비슷한 수준으로 맞추는 편이다. 나가는 이자비용보다 더 많은 이자수익을 거둬 '이자이익'을 거둘 수 있는 기본 토대다. 하지만 SVB의 경우 예금잔액이 대출잔액보다 2배 이상 많아도 이자이익이 발생했다. 예금 중 대부분을 '무이자 예금'으로 예치했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19가 유행했던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동성이 급증했고 미국내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에게도 막대한 자금이 투자됐다. 이는 상당부분 SVB 수신으로 연결됐다. 실제 2021년 SVB의 예금은 전년대비 86% 급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문제는 지난해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코로나19 엔데믹, 물가상승 등을 이유로 시장 유동성을 줄이기 시작하면서 나타났다. 자금이 필요해진 벤처기업과 스타트업들이 SVB에 맡겼던 돈을 인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미국 장기채에 집중 투자한 SVB의 포트폴리오가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통상 은행이 조달한 자금을 가장 많이 투입하는 분야는 대출이다. 하지만 유동성이 풍부한 SVB의 고객들은 대출이 필요하지 않았고, 결국 선택지는 미국 국채였다.
SVB의 자산구성을 살펴보면 미국 국채 등이 55%로 가장 많고 대출이 35%, 현금은 5%가량이다. 고객들의 인출요구에 응하기 위해선 보유하고 있는 국채를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미국 연준이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하면서 보유하고 있던 채권 가치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고객들의 예금인출은 지속됐고 미국 당국은 SVB의 자산 포트폴리오상 예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SVB가 파산에 이르게 된 이유다.
은행 관계자는 "SVB의 파산원인은 자산 포트폴리오의 편향이 절대적"이라며 "포트폴리오가 편향되지 않았더라면 재무구조 쏠림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고 파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금융당국, '특화은행' 도입 재점검 나서나
SVB가 파산하면서 최근 금융당국이 추진하던 '특화은행' 도입도 재점검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금융당국은 5대 시중은행이 지난해 높은 순익을 기록한 것은 사실상의 과점체제가 형성된 영향이 컸다고 봤다. 이에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특화된 곳에 집중적으로 서비스 하는 '특화은행'을 도입해 5대은행의 과점체제를 허물어 경쟁을 촉진하고 금융소비자의 부담을 낮추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특히 금융당국과 전문가들이 이를 논의하는 예시로 든 곳 중 하나가 SVB였다. 지난 3일 있었던 '제1차 은행권 경영·영업 관행·제도 개선 실무작업반' 논의에서는 특화은행 도입과 관련해 "미국 SVB는 별도 인가단위에 따른 특화은행은 아니지만 사실상 고위험 벤처기업만을 고객으로 상대하는 특화은행처럼 기능"이라고 소개됐다.
금융당국의 논의과정에서 예시가 된 은행이 파산하자 금융당국 역시 특화은행 도입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장 이복현 금감원장 역시 13일 SVB파산 관련 금융상황 점검회의를 열고 "이번 사태는 SVB의 특수한 영업구조가 최근 금융긴축 과정과 맞물려 발생한 경우"라고 짚었다. 금감원장 역시 특화은행의 리스크를 인지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은행 관계자는 "이번 SVB 파산은 은행의 사업 포트폴리오가 편향되면 건전성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라며 "무리하게 특화은행을 도입하기 보다는 충분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특화은행 문제점은 그간 금융당국과 전문가들간의 논의 과정에서도 지적된 부분"이라며 "특화은행 도입은 은행법 개정 등 시간이 많이 걸려 최대한 이르게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었지만 이번 SVB 파산으로 인해 재검토 수준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