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은 지난 5월 보험사, 학계, 유관·연구기관을 아울러 '보험개혁회의'를 출범했다. 보험산업이 민원다발 금융업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단기이익만 좇는 출혈경쟁을 벌여 소비자보호와 건전성 관리에 소홀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금융당국은 개혁 핵심 키워드로 '신뢰회복'과 '혁신'을 꼽았다. 그러면서 "보험개혁회의는 보험산업이 더 이상 정체돼선 안 된다는 절박한 공감대 속에서 출범했다"며 "혁신적 서비스를 제공해 국민경제에 기여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런 과정을 거쳐 8일 금융당국이 내놓은 제2차 보험개혁회의 내용에 대해 보험업계는 기대 이하라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자료를 꼼꼼히 살피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설익은 정책을 섣불리 발표한 것도 문제지만 소비자 실익이 있을지 '물음표'가 붙는다"는 게 안팎의 평이다. 업계는 특히 △의료자문 관행 개선 △임신·출산 보장 확대 △무사고 보험료 환급 등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그레이존 놓인 의료자문
우선 의료자문 관행 개선은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나온다. 의료자문은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울 때 가입자의 질환이나 진료 내용에 대해 전문의 소견을 구하는 절차다. 보험사기를 걸러내기 위해 만든 제도지만, 보험사가 보험금 부지급 사유로 악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에 금융당국은 보험 가입자가 진료·진단을 받은 의료기관보다 상급 기관에서만 의료자문을 하도록 제한했다.▷관련기사 : 의료자문은 상급기관에서만…"부당한 보험금 지급 거절 방지"(8월8일)
가령 보험 가입자가 동네 병·의원에서 진료를 받았다면 보험사는 그보다 윗급인 종합병원이나 상급종합병원 전문의에게 자문을 구해야 한다는 의미다. 병원 등급이 높아질수록 자문 공정성이 확보된다는 취지인데, 바꿔 말하면 규모가 작은 동네 병·의원은 보험사 의료자문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문제는 지금도 보험사 대부분이 병·의원보다 종합·상급종합병원 전문의에게 의료자문을 의뢰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달라질 게 별로 없다는 뜻이다.
가장 큰 규모인 상급종합병원은 윗 기관이 없어 '주치의 상세소견을 우선 확인한다'는 모호한 회색 영역으로 남겨놨다. 이에 대해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금융당국은 상급종합병원 진료·진단 건에 대해선 의료자문 면제를 주장하겠지만, 업계는 보험금 분쟁이나 이견 등을 이유로 상급종합병원에서도 의료자문을 시행해야 한다고 밀어붙일 것"이라고 말했다.
새 임신·출산 보험, 빠듯한 연말 출시
임신·출산 보장 확대는 반짝했다가 쓸쓸히 사라지는 정책성보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란 관측이다. 저출산·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올 연말 임신·출산을 보장하는 '신규' 보험상품을 출시한다는 게 금융당국 목표다. 당초 실손의료보험에서 임신·출산을 보장하는 방안은 의료개혁특위의 논의 사항이라 이번엔 빠졌다.
보험업계는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활성화에는 회의적이다. 지난해 기준 임산부가 20만명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수요층이 제한적인 데다, 정부 주도 상품인 만큼 보험료를 비싸게 매기기 어려워서다. 보험료가 싸면 손해율(보험사가 받은 보험료 대비 지급한 보험금 비율)이 올라가고 보험사는 물론 설계사 판매 의지도 꺾인다.
새 보험상품이라고 당국이 명명한 만큼 임신성 당뇨 합병증 등 기존 임신·출산 담보 외 새로운 보장을 개발해야 하는 어려움도 호소하고 있다. 정액형으로 '출산 축하금'을 주는 단순한 형태라도 상품 개발과 보험료 산정 근거가 되는 위험률 산출이 필수적인데, 4개월 남짓 남은 기간 동안 이를 산정하기 만만찮을 것이란 반응이다.
학교폭력, 성폭력, 가정폭력, 불량식품 등 피해를 보상하는 4대악 보험 등 이미 보험사들은 금융당국 압박에 '보여주기식' 정책성 상품을 내놓고 관심이 떨어지면 슬그머니 없애는 일을 반복해 왔다.
석연찮은 무사고 보험료 환급
보험가입 후 무사고 때 보험료 일부를 돌려주는 이른바 '무사고 보험료 환급'을 허용한 것을 두고도 뒷말이 나온다. 카카오페이손해보험 여행자보험이 무사고 시 보험료 중 일부를 환급해주는 방식을 인정하면서도 보험업법상 특별이익으로 본다는 단서를 달아서다.
이렇게 되면 최초 1년 납입보험료의 10%와 3만원 이내 중 적은 금액을 돌려줘야 한다. 고객 몫으로 돌아갈 환급금에 캡(상한선)을 만든 것이다.▷관련기사 : 여행자보험 등 무사고 환급 허용…임신·출산보험도 개발(8월8일)
향후 비판 여지가 있다는 점을 의식한 듯 금융당국은 추가 검토안도 밝혔다. 특별이익 한도를 조정하거나, 사업비 할인방식으로 무사고 보험료 환급금을 지급하는 안이다. 사업비 할인으로 바뀌면 보험사는 가입자가 낸 보험료 중 사업비 부문 내에선 재량껏 환급금을 책정할 수 있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과도한 환급으로 상품 건전성이 저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제한선이 있지만, 특별이익보다 운용 폭이 커진다"고 했다. 자동차보험과 실손보험 무사고 환급이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