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금껏 취업난이 아니었던 해가 없다. 대기업까지 신규 채용을 줄이면서 300인 이상 기업의 취업자 가운데 청년층 비중은 1998년 30.0%에서 2013년 18.0%로 떨어졌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작년 대졸 신입사원 취업 경쟁률은 평균 28.6 대 1을 기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청년 취업준비생들은 휴학이나 대학원 진학을 해보지만 막상 졸업 시즌이 되면 처지는 똑같아 진다.
최근 기업들이 탈(脫) 스펙 차원에서 열정과 창의성을 요구하면서 취업준비생의 고민은 더 커졌다. 스펙은 스펙대로 갖춰야 하는 데다 기업마다 기준이 제각각인 열정과 창의성을 위해 또 무언가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취업준비생들의 고민은 무엇인지, 기업들은 어떤 인재를 원하는지, 그 사이 간극은 얼마나 되고 어떻게 줄일 수 있는지를 살펴봤다.[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취준생의 하루..'高3으로 돌아왔다'
②'열정'..또 하나의 스펙일 뿐
③'스펙 안보자니'..기업들도 고민
④취업설명회 '냉탕과 열탕 사이'
⑤"놀며 배우며 취업하자"
⑥"취업 아닌 직무에 열정 보여라"
⑦이력 허위기재, 꼼짝마!
⑧사진으로 만난 취준생의 꿈
오전 6시30분. 채은정(25·가명) 씨는 오늘도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린다. 지난 2월 대학을 졸업한 후 사실상 백수 생활에 돌입했다. 하지만 일어나는 시간 만큼은 지키려 노력한다. 하루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채씨는 조간신문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몇달 전 아예 신문을 구독했다. 공부하는 느낌을 위해선 종이신문이 좋다는 생각에서다.
아침을 챙겨먹고선 졸업한 학교 도서관으로 향한다. 일주일에 두 번 취업준비생끼리 만든 스터디 모임에 참석하는데, 모임 준비도 하고 취업 정보도 얻기 위해서다.
같은 시각, 지방대 졸업 후 취업준비를 위해 서울에 올라온 김하나(24·가명) 씨. 그는 중국어 학원에 가기 위해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중국어를 배우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영어 말고도 제2외국어 하나쯤은 해야 할 것 같아 3개월짜리 강의를 등록했다.
김 씨는 '스펙'이 좋은 편이다. 학점은 4.5점 만점에 3.9점, 토익 990점 만점에 900점. 한자능력 3급, 컴퓨터 관련 자격증 3개를 갖췄다. 특히 2년간 캐나다 어학연수를 다녀왔기 때문에 영어 실력 만큼은 자신있다. 하지만 취업을 위해 영어실력만 내세우기엔 불안했다. 지방대 졸업생이다보니 뭔가 하나라도 더 잘해야 경쟁력이 생길 것 같다는 막연한 걱정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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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도서관 열람실에 자리잡은 채 씨는 노트북을 켜고 EBS 무료 역사강의를 듣는다. 일부 대기업들이 인문학 지식을 강조하면서 필기시험에 역사 과목이나 항목을 추가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어서다. 채씨는 "역사 관련 출제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감을 잡을 수 없어 막막하다"며 "한 대기업 채용설명회 담당자가 '불안하면 9급 공무원 역사 교재 한번 훑어보라'고 조언했지만 더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오전 11시. 중국어 학원서 두 시간 가량 공부를 마친 김 씨는 인근 유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유학원 인터넷 카페를 관리하는 일이다. 알바를 시작한 것은 학원비와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동생이 해외유학을 가는 바람에 자신까지 부모님께 손을 벌릴 염치가 없다. 김 씨는 "알바 시간이 길지만 크게 힘들지 않다. 오히려 취업 스트레스 때문에 지친다"고 토로했다.
최근에는 알바로 용돈 걱정은 없어졌으나 일하면서 뺏기는 시간이 아까워 다음 달에는 그만둘 생각이다. 시간과 돈 중 하나만 선택하기로 했다. 김씨는 이곳 유학원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대기업보다 연봉을 많이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싱숭생숭하기도 했지만 원래 생각했던 직종이 아니고 그동안 준비해 온 걸 포기할 수 없어 귓등으로 흘린다.
취업준비생의 움직임은 오후부터 가속도가 붙는다. 학교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채 씨는 대학 취업지원실에서 모의 자기소개서 첨삭 지도를 받는다. 얼마 전에 제출한 자기소개서 용지에 군데군데 빨간줄이 그어져 돌아왔다. 실전이 아니라는 생각에 공들이지 않고 작성했더니 지적 받은 부분이 많았다.
채 씨는 잠시 '이 짓을 계속 해야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학교 앞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오후 3시가 되자 다른 취업준비생 5명도 모였다. 같은 과 선후배다. 서로 취업정보를 나누고 모의 면접도 해본다. 매번 특정 주제를 정하고 외국어로 토론하는 연습도 한다. 두 세 시간 정신 없이 얘기한 뒤 저녁을 먹고 다시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저녁 7시. 유학원 알바로 반나절을 보낸 김 씨는 귀가하자마자 간단히 저녁을 먹고 중국어 복습을 시작한다. 몸이 노곤해져 시계를 보니 어느덧 자정이다.
밤 10시. 채 씨는 도서관에서 짐을 챙긴다. 재학생들은 학기 초라 일찌감치 가방을 쌌지만 채 씨와 같은 취업준비생은 밤 늦도록 자리를 지킨다. 채 씨는 도서관을 나서면서도 자기소개서에 한 줄이라도 더 쓸 수 있는 이색 경험이 없을까 고민한다. 대기업 취업에 성공한 이들의 후기를 보니 해외여행 중에 깜짝 놀랄만한 경험을 한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인문계 출신인 김 씨와 채 씨는 올해 상반기보다 하반기 공채를 노리고 있다. 상반기에는 주요 대기업들이 이공계 위주로 뽑는 데다 인문계를 채용한다 해도 경영학과 위주로 뽑기 때문이다. 하반기까지 반년 정도 남았으나 마음은 초조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덜컥하고 취직하는 친구도 있으나 한없이 기다리는 이들이 더 많다. 봄은 왔으나 취업준비생의 마음은 여전히 겨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