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증권사들을 대상으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위기 관리를 연일 강조하고 있는 가운데 증권사들도 자체적으로 우발채무 다이어트에 착수했다.
비중을 많이 차지하고 있던 신용공여 유형부터 규모를 확 줄였다. 신용공여형은 시공사가 대주단이 빌려준 돈을 갚지 못하면 증권사가 대신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의무를 지는 것이다. 우발채무 중에서도 리스크가 높은 유형에 해당한다.
다만 일부 증권사는 작년 하반기부터 신규 딜을 다시 받으며 우발채무가 늘었다.
대형사들 우발채무 최대 1조 줄여
자기자본 상위 8개 증권사(미래에셋, 한국투자, NH투자, 삼성, KB, 하나, 대신, 키움증권)의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이들의 우발채무 규모는 작년말기준 23조2018억원으로 2022년말(23조3605억원) 보다 1587억원 감소했다. 1년전에도 총 3000억원가량 줄인데 이어 감소세를 이어갔다.
우발채무는 당장 재무제표에 부채로 잡히지 않지만, 일정 조건에 해당하면 실제 채무로 전환될 우려가 있다. 증권사가 보유한 우발채무 대부분은 PF딜을 주관하면서 보증을 서주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회사별로 살펴보면, 우발채무 다이어트를 가장 확실하게 한 곳은 삼성증권이다. 규모는 2022년말 3조1687억원에서 작년말 1조9011억원으로 1조2676억원(40%) 줄었다. 삼성증권은 레고랜드 사태가 발발한 2022년에도 우발채무를 2021년 대비 1조원가량 줄인 바 있다.
미래에셋증권은 전년대비 7750억원 어치를 해소했다. 2022년 말에는 2조7549억원으로 집계됐는데 1년 후 1조9799억원으로 28% 감소한 것이다. 같은기간 한국투자증권도 5조2641억원에서 4조9153억원으로 3488억원(-7%) 줄였다.
하나증권도 3조1049억원으로 2조8986억원으로 2081억원(-7%) 감소했고, 키움증권은 1조6869억원에서 1조5225억원으로 1644억원(-10%) 줄였다.
우발채무는 유동성공여 유형과 신용공여 유형으로 나뉜다. 유동성공여는 통상 만기가 짧은 PF 유동화물인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등에 관해 매입보장 약정을 맺는 것인데, 유동화물의 만기에 도래했음에도 차환에 실패할 경우 이를 증권사가 사주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신용공여는 리스크가 더 높다. 시공사 부도나 매각 실패 등 문제가 생겨 시행사가 PF 대출을 갚지 못할 때 증권사가 약속한 한도만큼 갚아야 하는 의무가 발생한다. 주로 매입확약, 한도대출, 출자약정 형태로 계약을 한다.
증권사들이 가지고 있는 우발채무 대부분은 신용공여 유형이다. 작년 말 전체 합계액 23조2018억원 가운데 신용공여가 91%에 달한다. 유동성공여는 증권사가 짊어지는 리스크가 적은 만큼 수수료가 적은 반면, 신용공여는 리스크가 크고 증권사가 가져가는 수수료 수익이 많기 때문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기초자산이 신용위험에 노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용공여의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훨씬 크다"며 "증권사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을 추구하는 업종인만큼 수익성이 더 높은 신용공여형을 집중적으로 다뤄왔다"고 말했다.
지난 1년간 대형 증권사들은 리스크가 높은 신용공여 형태의 우발채무를 줄이는데 집중했다. 이에따라 신용공여형은 7856억원 감소했다. 삼성증권은 신용공여형에서만 1조1000억원을 줄였다. 미래에셋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은 각각 3000억원, 하나증권은 2000억원을 해소했다.
이처럼 증권사들이 2년 연속 우발채무를 줄이고 있는 건 금융당국이 PF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21일 부동산PF 정상화 추진을 위한 금융권·건설업계 간담회에서 "고금리와 공사비용 상승으로 사업성이 현격히 악화된 PF 사업장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며 경계감을 표했다. 그러면서 경공매를 통한 사업장 정리, 사업성평가 기준, 대주단 협약 개편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NH·대신·KB는 우발채무 늘어
반면 우발채무가 늘어난 곳들도 있다. NH투자증권, 대신증권, KB증권 등 3개 증권사의 우발채무는 2022년보다 증가했다. 작년 하반기부터 신규 딜을 다시 취급하면서다.
우선 NH투자증권은 전년 1조9663억원에서 3조3871억원으로 72.3% 증가했다. 증가한 액수로 따지면 1조4208억원이다. 신용공여에서 1조1000억원, 유동성공여에서 3000억원가량 늘어났다. 1년전에 신용공여만 4000억원 줄인 것과 다른 모습이다.
NH투자증권 관계자는 "주선계약이 연말에 반영돼 잔액이 증가하는 효과가 나타났다"며 "주선자가 최초인수계약을 진행하는 인수금융 특성상 일시적인 효과"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현재 증액된 부분은 딜 클로징(종료)되며 2월 말 기준 소진했다"고 덧붙였다.
KB증권은 4조1907억원에서 4조8919억원으로 7012억원 늘었다. 유동성공여 유형에서만 9000억원 증가했다. 대신증권은 신용공여에서만 4800억원이 늘었다. 두 곳도 작년 하반기부터 PF 신규 딜 주관에 나섰기 때문이다.
KB증권 관계자는 "우량 시공사를 낀 수도권 지역 영업활동을 강화하고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보증을 활용한 안정적인 대형 우량 딜 중심으로 영업을 했다"고 밝혔다.
대신증권 관계자는 "신규 딜을 집행하면서 집행한도를 채무보증(우발채무)으로 잡아놨는데, 아직 미발행 잔액이 많다"며 "때문에 한도금액에서 미이행잔액을 뺀 집행된 금액이 많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며 "전체 약정 한도 기준으로는 2000억원 늘어나는데 그쳤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