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기술탈취 논란에 섰던 롯데헬스케어가 결국 개인 맞춤형 건강관리 플랫폼 '캐즐'에서 영양제 디스펜서(기기명 '필키') 사업부문을 철수하기로 했다. 대기업의 스타트업 기술탈취 의혹으로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화해와 양보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 찜찜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롯데헬스케어는 공식적으로 사업 철수를 발표하지 않았다. 한무경 국민의힘 국회의원(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간사)이 롯데헬스케어와 알고케어 간 기술탈취 분쟁이 합의를 이뤘다고 자료를 배포하면서 롯데헬스케어의 디스펜서 사업 철수 사실이 공식화됐다.
앞서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 직접 알고케어와 롯데헬스케어를 취재했을 당시 두 사업모델이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인 맞춤형 건강관리 플랫폼' 사업은 국내외 다수 기업들이 추진하고 있고 개인 맞춤형 영양제를 제공하는 디스펜서도 유일무이한 사업 아이템은 아니었기에 두 회사 간 갈등을 예상하지 못했다.
두 회사의 디스펜서 작동 원리는 약국에서 사용하는 자동조제기와 비슷하다. 약국 자동조제기는 병원에서 받은 처방전을 컴퓨터 프로그램에 등록하면 디스펜서 내에 각각 나눠 들어있는 다양한 의약품이 1회 복용량에 맞춰 자동으로 포장된다. 롯데헬스케어가 알고케어에 사업 제안을 했을 당시 거론됐던 미국의 '히어로(hero)'라는 제품도 디스펜서 내에 10가지 알약(처방약과 영양제 등)을 채워넣으면 사용자가 설정한 일정에 따라 배출하는 방식이다.
또 지난 2020년 CES에 참가한 이스라엘의 '뉴트리코(Nutricco)'도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개인의 영양상태를 체크하고 적정량의 보충제를 자동 알약 분배기로 제공하는 사업모델이었다. 비록 뉴트리코는 시중에 출시되지는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필립스, 리비, 메다큐브 등이, 일본에서는 드리코스(Dricos)사의 '플러스미(+me)' 등 처방약이나 영양제 관련 디스펜서 제품들이 다수 출시돼 있다.
특히 알고케어 디스펜서의 핵심이자 경쟁력은 자체 개발한 영양제다. 반면 롯데헬스케어의 경우 타사에서 이미 개발하거나 출시한 영양제를 스마트폰 앱과 연동해 제공하는 단순 디스펜서에 그친다. 국내외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사업 아이템이었다면 기술탈취가 명백했겠지만 이번 사례는 조금 달랐다. 이에 알고케어가 주장하는 롯데헬스케어의 디스펜서 특허 침해 부분에 대한 법적인 판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술탈취 의혹은 해결되지 않은 채 마무리됐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생합의'라는 핑크빛 결말처럼 보이지만 정치권이 대기업이라는 프레임으로 롯데헬스케어를 옥죈 결과는 아니었을까 의구심이 든다.
롯데헬스케어 측은 "최근 확산된 불필요한 논란을 종식시키고 업계에 동반성장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해 디스펜서를 출시하지 않기로 했다"며 "디스펜서 불출시와 별도로 당사가 보유한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스타트업의 영업비밀을 탈취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지속 소명해 정부기관의 최종 판단을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앞서 지난 7일 정부와 여당은 '스타트업 기술탈취 피해근절 민당정 협의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한무경 의원은 "양사 간 도 넘은 비방은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한쪽 입장만 들을 것이 아니라 중립적 입장에서 양쪽의 목소리를 듣고 대화를 통해 신뢰를 쌓도록 도와주는 것이 관건"이라고 했다.
롯데헬스케어의 사업 포기 선언이 과연 정치권이 중립적인 입장에서 양쪽의 목소리를 들은 결과였을까. 물론 개인 맞춤형 영양제 디스펜서는 국내에서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사업모델인 만큼 대기업이 나설 경우 스타트업은 시장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의 발전과 소비자 편익을 고려한다면 시장은 독점이 아닌 경쟁체제로 조성돼야 한다. 법적으로 특허 침해 여부가 밝혀진 뒤 그에 합당한 조치가 이뤄졌다면 좀더 후련하게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