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신화에는 운명의 실을 관리하는 세 여신이 등장합니다. 밤의 신 닉스의 자매로 첫째가 운명의 실을 짜면 둘째가 이를 나눠주고, 셋째가 이를 자르며 생명을 거두는 역할을 합니다. 올림푸스 최고의 신인 제우스마저 세 여인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고 하죠.
SK바이오사이언스는 현재 화이자와 폐렴구균 백신 원액의 해외 수출을 두고 특허권 침해소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무역위원회의 불공정무역행위 조사도 받고 있습니다.
화이자와 분쟁에서 SK바이오사이언스의 운명을 쥐고 있는 것은 바로 '의료용 실(봉합사)'이라고 하는데요. SK바이오사이언스를 울고 웃게 만든 1, 2심 재판 결과에서 지난 2019년 대법원이 내린 이른바 '봉합사 판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특허법 침해 여부를 판단하는 원칙은 속지주의와 구성요소완비, 크게 두 가지입니다.
속지주의는 특허법의 효력이 국내에만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구성요소완비는 특허발명을 구성하는 요소가 하나라도 결여되면 권리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A+B+C 형태로 이뤄진 발명이 있다면 누군가가 A, B, C를 모두 포함한 발명(A+B+C)을 했을 때 침해로 볼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두 원칙에는 치명적인 빈틈이 있습니다. 바로 국내에서 부품(A, B, C)를 생산한 후, 해외에 수출해 그곳에서 완제품(A+B+C)을 만드는 사례입니다. 이 경우 국내에서 생산한 부품은 구성요소완비 원칙의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또한 해외에서 조립한 완제품은 속지주의 원칙을 벗어납니다.
지난 2019년 대법원에는 한 사건이 올라옵니다. 안면 리프팅에 쓰이는 봉합사 시술키트의 특허권자인 A사가 일본병원에 해당 키트의 부품을 수출한 B사를 상대로 제기한 특허권 침해소송이었죠.
대법원은 B사가 수출한 부품을 일본에서 조립해 생산한 시술키트에는 A사의 특허권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고 판결문에서 밝힙니다. 속지주의 원칙을 따른 겁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여기에 예외를 둡니다. 만약 가공조립 과정이 "극히 사소하고 간단"할 경우 국내에서 생산한 것과 같다고 본 것이죠.
이 예외적인 법리를 적용한 탓에 A사는 특허권리를 보장받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이 법리는 SK바이오사이언스와 화이자의 1, 2심 재판에서 그대로 적용됩니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지난 2019년부터 러시아 제약사에 폐렴구균 백신 원액과 제조기술을 기술 이전합니다. 원액(A, B, C)을 공급하면 러시아 제약사가 현지에서 완제품을 제조(A+B+C)해 판매하는 구조입니다.
화이자는 이에 반발해 이듬해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합니다. 원액을 가공, 조립해 완제품을 만드는 과정이 '극히 사소하고 간단'해 비록 러시아에서 만들더라도 특허권 효력이 미친다고 본 것이죠. 앞서 화이자는 지난 2018년 SK바이오사이언스와 법적분쟁에서 폐렴구균 백신의 국내 특허권리를 인정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 8월 1심 재판부는 "백신 원액의 생산 이후 러시아에서 예정된 '혼합 공정'은 극히 사소 간단하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화이자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봉합사 판례의 범위를 확대해 적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2심은 달랐습니다.
지난 3일 2심 재판부는 "(의료용 실과 달리) 생물학적 조성물을 제조하기 위한 혼합공정은 물리적, 화학적, 생화학적 반응에 관한 것이어서 고도로 제어된 제조조건과 각 공정의 정밀성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며 "이를 극히 사소하거나 간단하다고 볼 수 없다"며 특허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엇갈린 판결을 내립니다.
화이자는 2심 결과에 불복해 지난 19일 상고장을 제출했습니다. 결국 3심에서도 러시아에서 이뤄진 제조과정이 극히 사소하고 간단하느냐가 재판결과를 가를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법원의 판결은 하나의 통일된 법적 판단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전에 이뤄진 1, 2심 결과와 무게가 다릅니다. 현재 법학계에서는 봉합사 판례가 사실상 특허법을 이루는 근간 원칙(속지주의·구성요소완비)에 예외를 허용한 것으로 이를 더 확대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정차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 6월 발간한 관련 논문에서 "예외 법리에 추가 예외를 허용하는 것은 적어도 2024년 현재에는 엄격히 금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대법원 입장에서는 봉합사 판례를 확장할지 여부를 더 조심스럽게 판단해야할 수 밖에 없겠죠.
이 때문에 SK바이오사이언스와 화이자의 대법원 재판결과는 두 회사를 넘어 향후 다양한 특허침해 소송에 적용될 수 있는 큰 파급력을 가질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제약업계에 미칠 파장이 커 많은 제약사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과연 SK바이오사이언스의 운명을 가를 실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