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과 시공사 간 공사비 분쟁으로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조합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원자잿값 상승이 이어지면서 공사비 증액을 요구하는 사례가 증가했다. 최근 서울엔 공사 중단, 입주 중단 등의 극단적인 사례까지 발생하며 조합이 전전긍긍하는 실정이다.
이에 서초 래미안 원베일리 조합은 정비사업에 능통한 조합원을 구원투수로 내세웠다. 여의도 시범 등은 조합을 설립하지 않고, 신탁사에 정비사업을 맡기는 '신탁 정비'를 추진한다. 수수료를 감수하더라도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는 게 최선이라는 판단이다.
공사비 분쟁에 공사·입주 지연
정비업계에 따르면 지난 1일 입주 예정이었던 서울 양천구 신월동 신목동파라곤아파트(신월4구역 재건축)의 입주가 무기한 연기됐다. 시공사인 동양건설산업과 재건축조합이 공사비 분쟁을 마무리 짓지 못해서다.
동양건설산업은 원자재 가격 인상을 이유로 공사비를 74억원 증액할 것을 요구했다. 조합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유치권을 행사하겠다며 입구를 막고 입주를 제한하고 있다. 조합은 업무방해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지만, 당장 입주가 막힌 일반분양자들의 피해가 막심하다.
앞서 강동구 둔촌동 올림픽파크 포레온(둔촌주공 재건축)은 공사가 6개월간 중단됐다. 공사비 증액을 두고 조합과 시공사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시공사가 공사를 중단한 것이다. 입주 지연 등의 피해를 우려한 조합은 결국 증액에 동의하고 증액분에 대한 감정을 진행 중이다.
이처럼 조합과 시공사가 공사비 분쟁을 겪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작년 한국부동산원에 공사비 검증을 의뢰한 사례는 32건으로 전년(22건)보다 46% 증가했다. 공사나 입주가 지연될수록 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에 대부분 조합 측에선 시공사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
김예림 법무법인 심목 대표변호사는 "공사비는 애초 계약에 포함돼 조합이 추가 비용을 지급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지만, 시공사 없이 공사가 진행되지 않으니 현실적으론 합의가 최선"이라며 "최근에는 자잿값이 많이 오르면서 조합이 더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조합, 정비사업 능통자 모셔요~
공사비 증액으로 조합원의 부담이 커지면서 조합 임원 교체도 빈번하다. 과거 정비사업을 경험한 적이 있는 조합원을 '구원투수'로 내세운 사례도 나왔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 원베일리(신반포3차·경남 통합재건축) 조합은 지난달 말 임시총회를 열고 부조합장 선거를 진행했다. 전 아크로리버파크(신반포1차 재건축) 조합장인 한형기 후보가 2560표 중 1233표를 받아 부조합장으로 뽑혔다.
래미안 원베일리 조합은 현재 시공사인 삼성물산과 공사비 증액을 두고 분쟁 중이다. 작년 4월 삼성물산이 커뮤니티 고급화, 특화설계 등을 이유로 공사비를 1560억원 증액할 것을 요구했고, 한국부동산원이 공사비를 감정 중이다. 증액분이 모두 받아들여지면 조합원당 추가 분담금이 1억원에 달한다.
이에 조합원들이 현 조합 집행부를 고발했고, 조합장은 소송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직무집행이 정지됐다. 급기야 삼성물산이 오는 8월 예정이던 입주 시기를 2개월 연기할 것을 요구하자 조합원들은 새로운 대표 선출에 나섰다.
한형기 신임 부조합장이 조합원들의 지지를 받은 건 그의 이력 덕분이다. 그는 과거 아크로리버파크 조합장을 맡아 재건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때 경험을 살려 시공사와의 분쟁을 원활히 조율할 수 있으리란 기대다.
조합 없이 '신탁' 방식 추진도
정비사업을 시작하는 단지에선 아예 조합 설립을 포기하는 사례도 나온다. 신탁사에 정비사업을 위탁해 진행하는 방식이다. 일반분양 수익의 일부를 수수료로 지급해야 하지만, 주민이 직접 분쟁을 감당할 필요가 없다.
최근 신탁 방식을 고민하는 단지가 늘었다. 여의도 시범, 수정, 광장, 공작아파트 등은 신탁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다. 여의도 삼익과 도봉구 창동 상아1차도 신탁 재건축 예정 단지다. 양천구 목동신시가지14단지는 지난달 22일 신탁사 선정 입찰 공고를 냈다.
서울에선 그간 신탁 방식을 통해서만 시공사 선정 시기를 앞당길 수 있기도 했다. 다만 시의회가 10일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 조례'를 개정하면서 이제 조합이 추진하는 정비사업장에서도 조합설립인가 이후 시공사를 선정할 수 있게 됐다. ▷관련 기사: '재초환법' 개점휴업·주택은 침체…정비사업 '멈춤'(2월8일)
신탁방식의 경우 일반분양 수익의 3~4%에 달하는 수수료는 부담이다. 자잿값 인상, 분양시장 침체 등으로 재건축에 따른 수익이 감소할 전망인데, 수백억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급하는 건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
김예림 변호사는 "신탁 재건축을 시작하면 바로 시공사를 선정할 수 있고, 신탁사가 사업비를 저리로 대출해줄 수 있는 게 장점"이라면서도 "신탁 수수료 부담이 크고, 시공사가 일찍 들어오면 위험 감수 차원에서 공사비가 높게 책정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주민들의 부담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