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도시정비 시장에서 신탁 방식이 관심을 받고 있다. 공사비 인상 등에 따라 조합과 시공사의 갈등이 커지자 신탁사 주도로 정비사업을 진행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전문성이 있는 신탁사가 정비사업을 주도하면 시공사와의 협상이나 자금조달 등이 수월해서다. 그러나 수수료 부담이 높은 데다 참고할만한 성공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 등이 관건이다. 실제 사업 속도를 앞당길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조언이 나온다.
신탁 방식 떠오른 이유
2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올 들어 서울에서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단지들이 속속 신탁 방식을 검토하고 나섰다.
이중 신탁 방식이 가장 활발한 건 영등포구 여의도다. 여의도 재건축 단지들은 앞서 2017~2018년 사업 추진 속도를 높여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를 피하고자 줄줄이 신탁 방식을 채택한 바 있다.
시범아파트(1584가구), 한양아파트(588가구), 수정아파트(329가구), 광장아파트(744가구) 등이다.
이후 부동산 규제 등에 정비사업 추진이 사실상 막혀 있다가 올해 들어 공작아파트(373가구)와 은하아파트(360가구)가 신탁사를 선정하며 다시 신탁 바람이 부는 모습이다.
양천구 목동에서도 신탁 방식 재건축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분위기다. 목동14단지(3100가구)가 지난 3월 KB부동산신탁과 업무협약을 체결한 데 이어 목동9단지(2030가구)가 지난달 한국자산신탁을 예비신탁사로 선정했다.
주민 설문조사에서 신탁 방식 동의자가 약 92%에 달했던 신월시영(2256가구)도 5월 코람코자산신탁, KB부동산신탁과 3자간 업무협약을 맺었다.
도봉구에선 상아1차(694가구)가 지난 4월 KB부동산신탁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서울시의 '신속통합기획'을 추진중이다.
재개발 단지 중에선 종로구 창신9·10구역(2660가구)이 지난달 한국토지신탁과 업무협약을 맺고 신속통합기획을 통해 4000가구 대단지로 탈바꿈을 준비중이다.
이처럼 곳곳에서 신탁 방식의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데는 최근 '공사비 증액' 논란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다수의 정비사업 단지 조합이 공사비 증액을 두고 시공사와 갈등하면서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전문성 있는 신탁사에 맡겨 혹시 모를 리스크를 대비하려는 움직임이다.
통상 정비사업은 토지·주택 등 소유자들이 조합을 설립해 사업을 추진하는데, 조합은 전문성이 부족한 데다 각종 비리 등이 생기며 사업이 지연되는 문제점이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이와 달리 신탁 방식은 신탁사가 정비사업 시행자로 참여해 사업비 조달부터 분양까지 전체 과정을 맡는 것으로, 조합을 설립하지 않기 때문에 진행 속도가 빠르고 조합 임원들의 비리도 차단한다.
금융회사인 만큼 자금력이 탄탄하고 부동산 및 금융전문가 등을 통한 공사비 검증도 가능하다.
좋긴 한데…성공 사례는?
그러나 시장에선 신탁 방식 정비사업의 앞날을 마냥 '장밋빛'으로 보진 않는 분위기다. 높은 수수료, 조합원 이해도 부족 등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서다.
신탁 방식은 통상 분양 수익의 2~4%를 신탁사에 수수료로 지불해야 한다. 대형 건설사들의 분양 단지별 영업이익이 5%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최근엔 시공사들의 공사비 증액 요구가 커지면서 '공사비를 올려주느니 신탁사에 수수료를 내는 게 유리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신탁사가 공사비 검증을 철저히 할 수 있는 전문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동산 전문가는 "신탁사가 사업 시행을 대행한다면 상품성 평가, 공사비 적정성 검토, 인허가, 조합 갈등 조율 등 전반적으로 전문성이 필요하다"면서도 "그러나 신탁사에서 정비사업은 아직까지도 신사업 수준인 경우가 많아 분야별로 전문가가 골고루 확충됐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신탁 방식 정비사업의 성공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도 문제다.
대전 동구 'e편한세상 대전 에코포레'(2267가구)와 경기도 안양시 '한양수자인 평촌리버뷰(304가구)' 정도로, 신탁 열풍이 분 여의도 역시 아직까지 착공한 단지가 한 곳도 없다.
아직까지 조합원들의 거부감도 높은 편이다.
신탁 방식을 진행하려면 토지면적 3분의 1 이상을 신탁 등기해야 하는데, 등기부등본상 실질적 소유권이 신탁사로 이전되면 주민들의 의견이 배제될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첫 강남권 신탁 재건축 단지로 눈길을 끌었던 잠원동 신반포4차도 이런 이유 등으로 주민들이 반발해 신탁방식이 무산된 바 있다.
또 신탁 방식의 장점으로 꼽히는 사업 기간 단축, 저렴한 조달 금리 등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이 전문가는 "최근 신탁사 경쟁으로 수수료가 1%대까지 낮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사업 규모에 따라 여전히 비싼 곳은 비싸다"며 "문제는 그 돈을 들인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금융 조달의 경우 채권 시장에선 신용등급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오히려 신탁사보다 대형 시공사가 더 저렴하게 조달할 수 있다"며 "신탁사가 독립적으로 의사결정해서 사업 추진을 앞당기는게 가능할지, 기성불로 수수료를 받기 때문에 오히려 사업 추진 기간을 무리하게 단축하는 건 아닐지도 의심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워낙 조합 방식의 사업이 문제가 많이 드러나서 앞으로 신탁 방식이 늘어나긴 할 것"이라며 "시행 착오를 거치고 여러 사례가 나오면서 좀 더 방향을 잡아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