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 방식을 선택한 정비사업장이 확산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만만치 않다. 특히 서울 강남권을 중심으로 신탁 방식을 택했다가 기대와 달리 사업이 지연되거나 신탁사와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조합 방식으로 선회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신탁 방식의 장점으로 거론되는 신속성과 전문성 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 수수료에 대한 부담이나 신탁사에 등기 이전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반발감에 사업이 지연되거나 차질을 빚는 곳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그간 신탁 방식을 통해 성공한 정비사업지로 꼽히는 곳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전문성을 판단하기도 이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초 방배삼호 등 강남권서 조합 방식 선회
방배삼호(1·2·3차) 재건축 조합 설립 추진위원회는 정비계획 수립과 정비구역 지정을 위한 입안 제안을 조만간 서초구청에 제출할 계획이다. 내년 말까지 조합을 설립할 수 있도록 사업에 속도를 붙이겠다는 계획이다.
애초 이 단지는 지난 2017년 한국토지신탁과 사업을 추진해 오다 동의율을 충족하지 못하는 등 사업이 지연되자 6년 만인 올해 2월 조합 방식으로 방향을 튼 바 있다.
김종인 방배삼호 재건축 조합 설립 추진위원장은 "신탁 방식의 경우 재건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비용도 많이 들고 자칫 시어머니만 늘어나는 옥상옥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며 "지난 2월 신탁사가 완전히 철수한 뒤 이제 사업을 신속하게 진행하려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단지처럼 신탁 방식을 추진했다가 조합으로 선회한 사례는 적지 않다. 서초구 잠원동 신반포4차와 방배동 방배7구역, 강남구 압구정5구역, 강동구 명일동 삼익그린2차 등이다. 주로 서울 강남권의 수익성이 좋은 사업지들이다.
이런 단지들은 대부분 사업 초기 신탁사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가 기대와 달리 사업이 지연되거나 본계약에 앞서 계약 조항 등을 놓고 신탁사와 갈등을 빚다가 방향을 틀었다는 설명이다.
한 정비사업 관계자는 "신탁 방식을 선택했지만 5~6년간 사업이 지지부진한 경우가 적지 않고, 계약 과정에서 제시된 높은 수수료나 중도 해지가 쉽지 않다는 조항 등으로 갈등을 빚다가 계약을 해지하는 사례들이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업계에서는 신탁 계약 뒤 이를 해지하기 위한 조건으로 수탁자 전원 동의 또는 토지등소유자 80% 이상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점 등을 명시해놓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시공사나 협력업체의 계약을 해지하기 위해 조합원 총회 의결만 받으면 되는 것과 비교하면 까다로운 조건이라는 지적이다.
해지 까다롭고 수수료 높아
신탁 방식은 비교적 사업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다는 점과 안정성, 전문성, 투명성 등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게 장점으로 강조되지만 단점도 뚜렷한 편이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단점은 높은 수수료다. 신탁 방식은 통상 분양 수익의 1~4%를 신탁사에 수수료로 지불해야 한다. 시공사들의 수익도 5% 이내라는 점에서 수수료치곤 적지 않은 금액이다. 사업 규모에 따라 수백억원에서 많게는 천억원 단위를 넘어설 수 있는 금액이다.
불확실성이 높거나 사업이 지지부진한 경우에는 수수료를 내고 신탁을 선택하는 게 나을 수 있지만, 사업 추진 동력이 충분한 경우에는 불필요한 비용이라는 인식이 클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실제 서울 강남권처럼 사업성이 좋아 사업 추진 가능성이 높고 비교적 주민들의 의견이 잘 모이는 곳일수록 신탁 방식에 회의적인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윤수민 NH농협은행 부동산전문위원은 "사업이 불확실하거나 제어해야 할 게 많은 경우 아무래도 전문성이 높은 신탁 방식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며 "반면 강남처럼 이른바 스타 조합장 등을 통해 전문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경우라면 굳이 돈을 들여 신탁 방식을 택하기보다는 조합 추진이 유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신탁의 장점으로 거론되는 특징들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도 있다. 신탁 방식 역시 사업이 지연될 수 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신탁 방식을 진행하려면 토지소유자 75% 이상의 동의와 토지면적 3분의 1 이상 신탁 등기가 필요하다. 이는 신탁사 입장에서도 사업 추진의 걸림돌이 되고, 주민들 입장에서도 불안감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적게는 10억원대에서 많게는 수십억원에 달하는 자산(집)을 신탁사에 넘겨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3분의 1이상은 내 집을 넘거야 한다는 것인데 이 요건을 채우기 쉽지 않다. 등기부상 소유권이 신탁사로 넘어갈 경우 자칫 주민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실제 이런 지적에 따라 정부는 지난 26일 발표한 주택 공급 활성화 대책을 통해 신탁 방식 사업의 속도를 제고하는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토지면적 3분의 1이상 신탁 등기 요건을 없애고 토지소유자 75% 이상의 동의만 있으면 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정부가 시행령만 개정하면 돼 이른 시일에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신탁사의 전문성에 대한 의구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비사업 전문가는 "신탁사가 일반 조합원들에 비해 전문성이 높다고는 하지만 아직 신탁을 통한 정비사업 성공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경험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며 "과연 전문성만 보고 수백억원에 달하는 수수료를 내야 할 지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건설 업계에서는 시공사와의 공사비 갈등의 여지가 신탁사가 있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조합과 협상을 할 때도 건설사들이 무작정 공사비 증액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계약상 가능한 한도 내에서 추진하는 것"이라며 "신탁사와 협상을 하더라도 원자잿값이 오르면 증액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만큼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