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기삿거리를 잘 주는 사람입니다. 매일 새로운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들에게 기삿거리가 생기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습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매년 한 번씩 정기적(?)으로 기삿거리를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 부회장은 기자들에게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정 부회장은 매년 '신세계그룹 상생 채용박람회'에 참석합니다. 그 자리에서 늘 기자들과 만나 허심탄회하게 신세계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한동안은 '깜짝 놀랄 일'이 있을 것이란 예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정 부회장이 예고했던 '깜짝 시리즈'가 어떻게 가시화되는지 지켜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습니다. 편의점 위드미가 '이마트24'로 변신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올해도 정 부회장은 같은 행사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놨습니다. 예전처럼 '깜짝 시리즈'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신선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었던 두 가지 키워드는 '아마존'과 '미국'이었습니다. '아마존'과 '미국'은 그동안 신세계와 자주 연결된 단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많이들 들어서 아시겠지만 신세계는 오래전부터 온라인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방침을 밝혀왔습니다. 소비 트렌드가 바뀌고, 소비자들이 더 이상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보다는 인터넷과 핸드폰을 이용한 온라인 구매에 익숙해지고 있어서입니다. 최근 신세계가 1조원의 자금을 유치한 것도 온라인 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실탄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로벌 온라인 쇼핑업체인 아마존과 연결됩니다. 정 부회장도 유치한 1조원의 자금을 온라인 사업 확대에 쓰겠다고 밝혔습니다. 신세계에서 아마존은 롤모델인 셈입니다. 따라서 정 부회장이 아마존을 언급한 건 새롭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사진=이명근 기자/qwe123@) |
하지만 미국은 좀 다릅니다. 그동안 신세계는 미국과 큰 연관이 없었습니다. 주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가 주목받곤 했습니다. 중국의 경우 사업에 실패하면서 이미 철수한 상태입니다. 동남아시아는 이마트 등이 현지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시장입니다. 경쟁사인 롯데도 동남아시아 시장 확대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미국과 신세계가 아예 관계가 없진 않습니다. '스타벅스'나 '스타필드' 모두 미국 회사들입니다. 다만 지금까진 단순 합작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 진출입니다. 정 부회장은 미국 시장 직접 진출을 이야기했습니다. 최근 정 부회장은 미국 서부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현지 마트를 둘러보고 부동산 시장도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전 작업이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정 부회장은 왜 미국으로 가려 할까요? 정 부회장은 "미국 현지인들이 좋아할 만한 아시안 콘텐츠를 가져가 외국업체와 승부 벌일 생각"이라며 "PK마켓(이마트의 프리미엄 슈퍼마켓)에 미국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한식과 일식, 중식, 동남아식 등 아시안 토탈 푸드를 선보일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직접 경쟁해 진검승부를 해보겠다는 겁니다.
사실 미국 등 선진국 시장에 대한 정 부회장의 관심은 예전부터 지대했습니다. 선진국의 유통시스템을 국내에 들여와 역량을 키우고 신세계의 것으로 재해석해 언젠가는 미국, 유럽 등 본무대에서 제대로 붙어보자는 게 정 부회장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번 미국 진출 계획은 그런 큰 그림의 시작인 셈입니다.
신세계그룹 고위 관계자는 "정용진 부회장은 틈날 때마다 해외를 방문해 유통시스템을 직접 살펴보고 트렌드를 확인하는 등 오래전부터 선진국 시장 진출을 준비를 해왔다"며 "어느 정도 국내 시장에서 역량이 쌓인 만큼 신세계만의 프리미엄 상품과 전략이 현지에서 통할지를 확인하고 싶어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신세계는 내년 5월에 미국 서부 지역에 PK마켓을 오픈할 계획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미국 내 PK마켓의 수를 늘려갈 계획입니다. 필요하다면 현지업체 인수도 검토하겠다는 것이 정 부회장과 신세계의 생각입니다. 그만큼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칠 계산을 세워둔 상태입니다.
▲ 사진=이명근 기자/qwe123@ |
미국 진출 아이템으로 푸드를 지목한 것도 정 부회장의 생각입니다. 현지인들이 거부감 없이 접근하고 또 반복적으로 구매하도록 해 자연스럽게 신세계의 브랜드 파워를 올리는 이른바 소프트 전략을 세운 셈입니다. 이미 중국 시장에서 큰 실패를 맛본 만큼 어설프게 유통이나 물류 등의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기보다는 푸드라는 아이템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죠.
신세계그룹 관계자는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부문부터 확실하게 하고 나가자는 생각으로 푸드를 정했다"면서 "그동안 국내에서 피코크 등 각종 PB상품과 HMR 등 푸드 부문에서의 경쟁력을 확인한 만큼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한다면 승산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습니다.
업계에서도 신세계의 미국 진출에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그동안 국내 유통업체들은 주로 중국이나 아시아권에만 집중했던 탓에 신세계의 미국 진출 계획에 대해 다소 낯설어하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유통산업의 영역이 넓어진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이라면서도 "사전에 철저한 준비작업이 없으면 제2의 중국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정 부회장은 업계에서 무척 꼼꼼한 경영을 하기로 유명합니다. 대신 결정한 사안은 저돌적으로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신세계의 미국 진출은 오랜 시간 준비한 프로젝트입니다. 정 부회장의 시선은 아마 미국을 넘어 멀게는 유럽까지 바라보고 있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성공이 필수적입니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해외업체와 진검승부의 결과는 어떻게 끝날까요? 벌써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