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 말이 되면
어김없이 시대를 뛰어넘어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가수 이용의 '잊혀진 계절'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통기타 좀 친다고 하면
떠나는 가을을 아쉬워하며
감성에 젖어 흥얼거렸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망원동 한 연습실
가수 '아일랜드기타'의
감성 젖은 목소리가
통기타와 첼로 연주에 맞춰
가을밤을 물들이고 있다.
"작년 정규앨범 1집이 나왔는데
코로나로 공연을 못하고 있어요.
공연장에서 더 많은 팬들을
빨리 만나보고 싶습니다.
타이틀곡은 '손님'입니다.
물결처럼 잔잔히 흐르는 피아노
물제비를 하는 듯한 베이스
그 위를 스치는 드럼과 첼로
가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재즈스러움이 묻어나는 곡이죠.
평범한 우리 부모님들의
자식을 향한 그리움과 기다림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평생 손님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만든 노래죠.
'아일랜드기타'는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공부했다.
노래를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
"백령도 위쪽 대청도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자랐어요.
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잖아요.
육지까지 나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중학교 때 군대 간 오빠가
남겨둔 통기타를 보게 됐죠.
기타를 치기 시작하면서
코드를 공부하게 되고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이
갈수록 많아졌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는데
내가 치는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어요.
때로는 바위 위에 앉아
출렁이는 파도 소리와 함께
어떤 날은 높은 곳에 올라가
끝없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그렇게 노래를 부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삶에
스며들었던 것 같아요."
"고교시절 고전소설을 좋아했어요.
특히 헤르만 헤세가 쓴
'지와 사랑'이란 소설을
너무 감동 있게 읽었죠.
독일어로 섬세하게 써내려
학자와 예술가의 삶을 보며
독문학에 빠지기 시작했죠.
특히 고등학교 선생님이
이 과정에 큰 영향을 줬는데
일본어 수업시간인데도
독일이야기를 자주 해주셨죠.
또 펄벅의 장편소설인
대지를 읽고 읽으면서
모래바람 부는 중국을 그렸죠.
지금 생각해보면 책을 통해
상상하며 감성을 키웠던 것 같아요."
"18년간 섬에서 생활하다가
서울로 나와서 살다 보니
경험하지 못한 게 대부분이었죠.
새로운 문화를 접하다 보니
뒤늦게 제 안의 세계를
조금씩 발견했던 것 같아요.
20명 남짓한 초등학교 친구들과
보낸 시절이 대부분이던 만큼
서울이 전부 새롭게 다가온 건
어쩌면 당연했던 것 같아요."
"음악이 항상 삶의 한 축이었지만
직업이 될 거란 생각은 못 했어요.
대학교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무대에 서서 노래를 하는데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희열을
강하고 분명하게 느꼈죠.
그러면서 내가 할 일이 이거구나
그렇게 결심했던 것 같아요.
무대에서 행복감이 너무 컸어요.
싱어송라이터는 제 생각과 가치관을
글과 음악으로 표현하는 사람인데
저에게 맞는 옷을 찾았던 거지요.
제 마음속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음악으로 만들어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늦었지만 찾았던 것 같아요."
"오랜 기간 언더그라운드에서
포크가수로서 활동했어요.
당시만 해도 기타 치며 노래하는
여자 가수는 많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불러주는 데가 많아서
경제적으로 어렵진 않았는데
제 노래를 부를 순 없었죠.
10년간 노래한 곳도 있었는데
어느 날 공허함이 찾아왔어요.
노래를 하는 건 좋았지만
늘 남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한계를 느낀 거죠.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아닌
손님들이 원하는 신청곡을
주로 부를 수밖에 없다 보니
고민이 찾아왔던 것 같아요.
경제적으론 여유가 생겼지만
타성에 젖은 노래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
"노래를 부를 땐
제 감성을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녹음한 노래를 들어보면
낯선 저를 마주하게 되면서
정체성이 흔들리기 전에
제 길을 가야겠다 생각했어요.
혼자 흥얼흥얼하던 노래들로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줬는데
너만의 느낌이 있어서
좋다는 조언을 들었어요.
기타 치면서 노래만 하다가
작곡과 작사, 편곡을 배워가며
2009년 아일랜드기타란 이름으로
첫 싱글 음반을 발매했어요.
'아일랜드 기타(Island guitar)'는
섬에서 기타 하나 들고 나왔다는
단순한 뜻이긴 한데
학창시절 대부분을 섬에서 보낸
제 정서와 지향하는 음악 색깔을
잘 표현하는 이름입니다."
"그다음 미니 앨범이
2014년 'Natural'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무려 5년 만에
정규앨범 1집을 내게 됐는데
'제 음악'이라고 드릴 수 있는
대표 앨범으로 꼽고 싶습니다.
물론 그전 앨범에도
많은 노력과 애정이 들어갔지만
습작 수준의 느낌이었던 터라
제 음악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요.
반면 이번 앨범에 실린 음악들은
그동안 제가 추구하고 싶었던
음악에 제 생각을 가장 잘 입혔죠."
"시간이 지나면서
음악이 좀 더 심플해지고
정제되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음반을 낼 때마다
최선을 다해 만들었지만
막상 지금 들어보면
정제되지 못한 부분이 많거든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제 생각을 노래를 통해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한
제 음악을 보여드리는 거죠.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어렸을 때부터 섬에서 자라며
스며든 감성들인 것 같아요.
이 감성들은 어떤 음악을 하든
그대로인 것 같아요.
모르는 것을 알아가며
순진함을 잃어버린다고 하는데
순수함은 시간이 지나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자기 색깔을 찾아가려면
욕심이 좀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몇 십 번이나 다시 녹음하며
저만의 색을 입히려고 했는데
20년 가까운 노래를 부르면서도
몰랐던 것들을 찾기도 하고
또 새롭게 배우기도 하면서
내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깨닫게 되고
그걸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도 어느 정도 가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더 욕심이 생긴 거죠.
음악을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해요.
그러면서 새롭게 기준치가 생기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이번 앨범입니다."
"솔직하게 노래하고 싶어요.
기교보다는 정직하게
또 거대하게 덮치는 파도보단
고요한 호숫가의 잔물결같이
미묘한 떨림을 전하는
그런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나무에 핀 새싹들이 자라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다가
땅으로 떨어진 후에야
더 성장한 봄을 기다린다.
버려야 생기는 공간
그 속에 행복을 채워 넣는
10월의 마지막 밤을
만들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