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때 다른 결정을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말이 익숙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많은 제품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그 절묘한 한 끗 차이로 어떤 제품은 스테디셀러가, 또 어떤 제품은 이름도 없이 사라집니다. 비즈니스워치에서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려 합니다. 결정적 한 끗 하나면 여러분들이 지금 접하고 계신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와 함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시겠습니까. [편집자]
고급 스웨터 vs 순금 반지
'미원 빈 봉지 5장으로 순금반지 하나!'
50여 년 전인 지난 1970년 초. 국내 식품 업계에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조미료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던 두 기업이 자사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들에게 경품을 내걸었는데요. 무려 '금반지'와 '고급 스웨터'였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첫 포문은 후발주자인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의 미풍이 열었습니다. 미풍은 10만명을 대상으로 '무제한대선물잔치'라는 이름의 경품 행사를 벌이기로 했는데요. 이 행사 선물 목록 중 가장 좋았던 것이 바로 고급 스웨터였습니다.
그러자 미원(현 대상)도 가만히 있지 않았죠. 미원은 15만명을 대상으로 '호화판 사은대잔치'를 실시했습니다. 경품으로는 금반지를 걸었습니다. 이 업체들이 이런 대대적인 행사를 한 이유는 사실 별 게(?) 아니었습니다. 제품 포장을 바꿨다며 벌인 이벤트였습니다.
두 업체의 경쟁적인 경품 행사가 화제가 되자 소비자들은 혹했습니다. 너도나도 '사재기'를 시작했습니다. 새 포장을 뜯어 빈 봉지를 5봉 보내면 경품을 주는 행사였기 때문입니다. 미원과 미풍의 경품에 응모하느라 당시 우체국이 큰돈을 벌었다고 하네요.
실제 당시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이 사은 행사 덕분에 두 업체 제품의 하루 판매량이 평소보다 3배 이상 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당시 미원과 미풍의 경쟁은 치열했습니다. 조미료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미원과 이를 따라잡으려는 제일제당 미풍의 알력 다툼이 대단했습니다.
물론 이게 좋은 일만은 아니죠. 결국 치안국이 나섰습니다. 두 업체가 소비자들의 사행심을 자극한다며 내사에 나선 건데요. 당시 정부는 국가적으로 '소비 억제'와 '저축 생활'을 권장하고 있던 터라 충분히 문제가 될 만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상공부의 제재로 경품 행사는 얼마 뒤 막을 내립니다.
"미원이 흔들린다" 외치자 우르르
지금 돌아보면 참 별일이 다 있었다 싶습니다. 하지만 두 업체가 오랜 기간 벌였던 '전쟁사'를 살펴보면 이 정도 사건은 가벼운 해프닝에 불과합니다. 두 업체의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영업 사원 간 폭력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지난 1977년 4월 한 시장에서 제일제당 직원들이 미풍을 홍보하면서 '미원이 흔들리고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이를 본 미원 직원들이 항의했고 결국 집단 몸싸움이 일어났습니다.
1984년에도 난투극이 있었는데요. 미원 측이 한 시장에서 자사 제품 '맛나'를 홍보하는 행사를 벌였습니다. 그러자 제일제당이 바로 맞은편에 '다시다' 판매대를 설치했습니다. 결국 얼마 뒤 싸움이 벌어졌고요. 기사에 따르면 각목까지 동원됐다고 하는데요. 기사는 이 사건을 <미원·제일제당, '맛' 경쟁서 '주먹' 경쟁으로>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지금 봐도 제목을 참 잘 달았네요.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을 하다 보면 서로 비방을 하는 모습은 지금도 업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케팅이 과열되고 법정 싸움까지 가는 일도 종종 있죠.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폭력 사태까지 벌어지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특히 미원과 미풍 사이에는 불상사가 우연히 한 번 벌어졌던 게 아닙니다. 종종 그랬다는 점에서 얼마나 경쟁이 치열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삼성, 미풍 인수해 '공격 앞으로'
미원과 미풍의 경쟁이 이토록 치열했던 이유는 뭘까요. 이제 와서 정확한 원인을 밝혀낼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당시 조미료 산업의 경쟁 구도를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는 있습니다. 당시에도 재계 선두권에 있던 삼성은 1968년 군소 업체인 '미풍'을 인수합니다. 조미료 시장에 첫발을 내디딘 겁니다.
삼성은 단숨에 미원을 제압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우선 미풍을 삼성의 계열사인 제일제당과 합병시켜 전열을 정비했습니다. 1969년 3월에는 미원을 제외한 조미료 업체 3곳과 제휴를 맺습니다. 공동판매 회사를 설립해 상표를 미풍으로 통일, 연합 세력을 만든 겁니다. 이로써 '미풍'의 시장 점유율은 순식간에 19%에서 46%가 됐다고 합니다.
미원으로서는 삼성이라는 대기업을 상대해야 하는 부담이 생겼습니다. 국내 조미료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던 미원에게도 삼성의 등장은 긴장할만한 일이었습니다. 대기업의 힘은 무서우니까요. 하지만 미원은 사운(社運)을 걸고 '결사 항전'을 벌입니다. 미원이라는 회사에 '미원'은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고급 스웨터에 순금 반지로 응수했던 것만 봐도 당시 미원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일제당의 공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일제당은 미원이 일본의 아지노모토의 기술에서 나온 것에서 착안, 아예 일본 아지노모토와 기술제휴를 맺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그 탓에 많은 소비자들은 우리 기업의 독자 기술로 만든 제품보다 해외 업체와 기술 협력을 한 제품에 더 신뢰를 보내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를 이용해 제일제당은 미원을 공격한 겁니다.
하지만 미원은 버텼습니다. 이미 '1가구 1미원'이 정착해 있던 데다, 소비자들도 상점에서 "미원 주세요"가 더 익숙했습니다. 그만큼 미원은 생각보다 깊숙이 소비자들의 생활을 파고든 상태였습니다. 제일제당으로서는 이미 미원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의 입맛과 습관을 넘어서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결과 미원은 조미료 시장 1위 수성에 성공합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도 항복을 선언했죠. 그는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 세상에 내 맘대로 안 되는 세 가지 중 하나로 미원을 꼽았습니다.
화학조미료 논란…미원의 '암흑기'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미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쓰디쓴 패배를 맛본 제일제당은 1975년 새로운 개념의 제품을 내놓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시다'입니다. 탤런트 김혜자 씨의 "그래 이 맛이야"라는 CF로도 유명하죠. 쇠고기와 멸치 등을 원료로 국물 맛 내기용으로 낸 제품입니다. 예전 미원과 미풍 등의 제품은 '화학조미료'로 불렸는데요. 제일제당은 다시다를 '천연조미료'로 광고하며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쳤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 '화학조미료' 유해 논란이 벌어지면서 제일제당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제일제당은 다시다 마케팅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미원으로 대표되는 '화학조미료' 시장에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서입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죠. 다시다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 전성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미원은 자사 제품이 화학조미료가 아니라 '발효 조미료'라고 항변했지만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미원도 1982년 '쇠고기 맛나'라는 제품을 출시하며 맞대응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천연조미료 시장(현재는 종합조미료 시장이라고 부릅니다)에서는 후발주자로 오랜 기간 다시다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 미원은 재기를 노리고 있습니다. 과거 미원이 논란이 됐던 건 MSG가 유해하다는 일각의 잘못된 주장 때문이었는데요. 논란이 처음 일었던 당시부터 미원은 MSG가 인체에 무해하다고 주장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여기에 관련해서도 많은 스토리가 있는데요.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이어질 이야기에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랜 기간 MSG 유해 논란에 시달려왔던 미원은 2010년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청이 "MSG가 인체에 무해하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으면서 한숨을 돌리게 됩니다. 이후 미원에 대한 인식은 점차 바뀌어왔습니다만 여전히 그 후폭풍은 남아있습니다. 이 때문에 미원은 오랜 기간 MSG가 무해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주력해왔는데요. 이제는 미원이라는 제품 이미지를 젊게 만드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미원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