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T로스만스(BAT)의 선택은 '신형'이 아닌 '개선형'이었다. 공식 출범 후 첫 제품으로 '글로 프로'의 개선형 '글로 프로 슬림'을 선택했다. 글로 프로의 흥행을 이어가며 '집토끼'를 잡으려는 구상으로 풀이된다. 업계의 시선은 경쟁사 필립모리스와 KT&G의 신제품 출시 여부에 쏠리고 있다. 궐련형 전자담배 시장 형성 초기처럼 '3파전'을 통한 고속 성장이 가능할 것인가가 관심사다.
궐련형 전자담배 시장의 전망은 밝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실내 흡연 니즈가 늘며 시장이 다시 성장하고 있다. 필립모리스·BAT그룹은 글로벌 시장에서 궐련형 전자담배로 일반담배를 대체하겠다는 장기 계획을 실행 중이다. KT&G 역시 '릴' 등 궐련형 전자담배를 차세대 핵심 사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변수는 정부의 규제다. 정부는 지난 2019년 액상현 전자담배 유해성 논란 이후 전자담배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마케팅·광고 등에 대한 규제도 마련했다. 궐련형 전자담배와 구조·특성이 비슷한 가향담배에 대한 규제 법안도 발의돼 있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많다.
'글로 하이퍼' 출시 안한 속내
BAT는 궐련형 전자담배 신제품 '글로 프로 슬림'을 세계 최초로 국내 시장에 출시한다고 27일 밝혔다. 글로 프로 슬림은 지난해 초 출시된 글로 프로의 개선형 제품이다. 두께와 무게를 줄여 편의성을 극대화하면서도 '부스트 모드' 등 기존 글로 프로의 강점을 유지했다. 스타일리시한 경험을 중시하는 국내 성인 소비자의 취향을 적극 반영했다는 설명이다.
당초 업계에서는 BAT가 '글로 하이퍼'를 국내에 선보일 것으로 예상했다. 글로의 시장 점유율이 정체돼있어서다. 하지만 BAT는 '안정'을 선택했다. BAT는 최근 공격적 프로모션을 통해 글로 프로의 저변을 확대했다. 따라서 기존 글로 프로에서 사용하는 스틱과는 호환되지 않는 글로 하이퍼를 투입할 경우 고객 이탈이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
반면 글로 프로 슬림은 글로 프로와 동일한 스틱을 사용한다. 대신 소비자들의 니즈를 반영했다. 이를 통해 '충성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 이것이 BAT의 노림수다. BAT의 전략이 성공한다면 글로 프로 슬림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더욱 확대할 수 있다.
BAT는 글로 프로 슬림을 통해 기존·신규 고객을 동시 공략할 계획이다. 국내 궐련형 전자담배 시장에서 가장 최신 단말기는 작년 9월 출시한 KT&G의 '릴 솔리드 2.0'이다. 단말기 배터리의 평균 수명은 1년 내외다. 즉 조만간 교체 수요가 도래한다는 의미다. BAT는 편의성을 극대화한 단말기를 경쟁사보다 먼저 투입해 경쟁 브랜드 소비자가 글로를 선택하도록 유도하겠다는 구상이다.
김은지 BAT 대표는 "글로 프로 슬림은 지난해 국내 시장 점유율 45% 성장을 이끈 글로 프로의 흥행을 이어가고자 선보인 모델"이라며 "담배 시장의 화두인 궐련형 전자담배 분야에서 제품 혁신과 포트폴리오 확장을 통해 시장 전환을 주도하겠다. 향후 시장 추이를 살펴본 후 글로 하이퍼 등 신제품 투입도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필립모리스·KT&G도 신제품 낼까
BAT가 움직이면서 필립모리스·KT&G의 대응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필립모리스가 '아이코스 일루마'를 국내 시장에 투입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필립모리스는 2017년 이후 아이코스에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 이 탓에 아이코스의 제품 경쟁력이 여타 경쟁제품에 비해 다소 열세라는 분석이 많다.
아이코스 일루마는 글로·릴과 유사한 '인덕션 히팅 시스템'이 적용된 제품이다. 내구성에 문제가 있다고 알려진 히팅 블레이드를 없앤 제품이다. 다만 필립모리스는 아이코스 일루마의 구체적 출시 계획을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KT&G는 다소 여유있는 모습이다. KT&G는 지난해 '릴 하이브리드 2.0'과 '릴 솔리드 2.0'을 연속 히트시키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현재 시장 점유율은 39%대로 약 50%인 필립모리스와 양강 구도를 굳혔다. 일반 담배 시장 점유율은 60% 이상으로 압도적이다. 필립모리스·BAT가 글로벌 본사 전략에 따라 일반담배 사업에 힘을 빼고 있어 전망도 밝다. 급하게 궐련형 전자담배 신제품을 투입할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KT&G는 지난해부터 필립모리스인터내셔널(PMI)과의 협업을 통해 릴을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 올해 들어서는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북마케도니아 등 유럽 동남부와 중앙아시아까지 판로를 넓혔다. KT&G 입장에서는 성공을 확신하기 어려운 신제품 투입보다 검증된 제품을 활용해 신규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보다 유리하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BAT·필립모리스의 신제품이 시장을 잠식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궐련형 전자담배 고객의 충성도는 일반담배에 비해 낮다. 오랫동안 존재한 브랜드가 드문데다 제품이 빠르게 개선되고 있어서다. 특히 글로 프로 슬림, 아이코스 일루마 등 신제품은 기존 제품 보다 개선된 '편의성'을 무기로 내세우고 있다. 론칭 후 비슷한 외형·구조를 유지해 온 릴에게도 변화가 필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 규제가 변수
궐련형 전자담배 시장은 앞으로도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 상반기 궐련형 전자담배 판매량은 사상 최초로 2억갑을 넘어섰다. 반면 같은 기간 일반담배의 판매량은 전년 대비 7.2% 줄었다. 코로나19로 실내 흡연 니즈가 늘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주요 업체의 신제품이 투입된다면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세계적으로도 궐련형 전자담배는 '대세'다. 야첵 올차크 PMI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일반담배 사업의 단계적 철수를 시사했다. 10년 내 영국에서 '말보로'를 철수시키고, 장기적으로 '헬스케어 기업'으로 변신하겠다는 구상이다. BAT글로벌 역시 오는 2030년까지 비연소 제품 소비자를 5000만명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국내 시장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변수는 정부의 규제다. 담배업계는 궐련형 전자담배가 일반담배와 다른 ‘위해성 저감 제품’이라고 강조해 왔다. 반면 정부는 일반담배와 동일하다고 보고 있다. 김강립 식약처장은 "전자담배가 일반담배보다 덜 해롭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규제도 강화되고 있다. 정부는 궐련형 전자담배 단말기 판촉활동을 제한했다. 또 궐련형 전자담배와 유사한 일반담배인 '가향담배'에 대한 규제 법안도 발의된 상태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궐련형 전자담배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가져주기를 바라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궐련형 전자담배는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제품이지만 국내에서는 몇 년째 규제 기조에 변화가 없다"며 "미국·영국 등에서 궐련형 전자담배의 위해성 저감이 인정되는 등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국내에서도 객관적 연구를 통해 마련한 기준에 따른 합리적 규제안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