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김치는 미국인들에게 낯선 식품이었다. "냄새가 이상하다", "너무 매울 것 같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월마트 냉장 코너에서, 코스트코 매대에서, 타깃 식품관에서 김치를 집어드는 소비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김치가 미국인의 일상에 스며든 데는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다. 김치 1위 기업 대상을 통해 김치가 미국 주류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봤다.
메이드 인 US
지난 15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동부의 인더스트리 시티에 위치한 대상푸즈USA의 김치 공장에서는 배추를 세척하는 물소리와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가득했다. 20명이 넘는 직원들이 각자 맡은 공정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공장에서는 하루 최대 8톤의 배추김치를 생산할 수 있다. 방창숙 대상푸즈USA 공장장은 "한국에서 하루 200톤 이상 생산하는 것과 비교하면 작은 규모지만 이곳의 성장세는 무척 가파르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공장의 김치 생산량은 지난해보다 2.5배 이상 급증했다.
대상 LA 공장의 배추김치 생산 공정은 크게 '배추 절임-양념 버무림-숙성-포장'으로 나뉜다. 포기김치가 아닌 먹기 편하게 조각 낸 '맛김치'를 생산한다. 첫 번째 공정은 배추 절이기다. 캘리포니아주 북쪽인 워싱턴주부터 캘리포니아주, 그리고 국경 너머 멕시코에서 배추를 공급 받는다. 거리가 멀어보이지만 새벽에 수확하면 그날 오전 중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받은 배추를 조각 형태로 잘게 자른 후 소금물에 16시간 이상 절인다.
김장 양념은 먹기 좋게 손질된 무·생강·마늘·파 등을 고춧가루·멸치액젓 등과 버무려 만든다. 모든 재료는 단계마다 꼼꼼히 세척하고 직원들이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만든 양념을 숙성시킨 후 절인 배추와 양념을 7대 3 비율로 섞는다. 양념을 버무린 김치는 약 20㎏씩 소분해 벌크로 포장한 뒤 저온 창고로 옮긴다. 이 창고에서 하루에서 사흘 정도의 숙성 과정을 거친다.
숙성이 끝나면 본격적인 포장 공정으로 들어간다. 300g, 400g, 1.2㎏ 등 고객사와 약속한 용량에 맞춰 자동으로 계량하고 필름을 부착한다. 엑스레이로 이물질 검사를 거친 뒤 박스에 담아 출하한다. 방 공장장은 "300g 소용량은 주로 월마트 같은 주류 채널에, 1.2㎏ 큰 용량은 교민 시장에 공급된다"고 설명했다.
현재 이 공장에서는 맛김치 외에도 다양한 김치를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 실비김치를 모티프로 매운맛을 강조한 '스파이시 김치'의 생산을 시작했고 올해 초부터는 코스트코용 오이김치도 생산 중이다. 현지 입맛에 맞춘 물김치인 '워터래디시 김치'도 내년 1월 출시를 목표로 생산을 준비하고 있다.
방 공장장은 "김치 하면 떠오르는 배추김치에 약간의 변주를 주기도 하고 배추가 아닌 별미김치들도 선보이면서 투트랙으로 운영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별미김치는 배추김치 못지 않게 인기가 높다. 그는 "미국인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김치를 더 좋아하다보니 앞으로는 별미김치 매출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비싸도 '사명감'으로
마지막 포장 공정은 상당 부분 자동화돼 있다. 계량, 필름 부착, 스티커 부착, 박스 포장까지 자동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김치 생산 공정 전체를 완전히 자동화하는 것은 어렵다. 방 공장장은 "배추는 크기와 모양이 다 다르다"며 "그걸 기계에 맞추는 게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이미 많은 공정이 자동화 돼있다. 계약재배를 통해 길러진 배추를 대상이 직접 만든 플라스틱 박스에 공급받기 때문에 배추의 크기, 형태가 규격화돼있어서다. 이 박스는 대상이 1990년대에 전국에 공급한 것으로 지금은 업계 표준이 됐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렇게 규격화 된 배추를 받기 어렵다. 방 공장장은 "배추가 미국에서 즐겨 먹는 채소가 아니다보니 우리 규격에 맞는 것들만 골라 공급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래서 배추를 투입하고 양념을 넣는 과정은 여전히 사람 손이 필요하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배추 가격도 비싸다. 한국에서는 도매가 기준 ㎏당 1000원을 넘지 않는다. 반면 미국 배추 가격은 올해 1.1~1.2달러(1500~1800원)에 형성돼 있다. 여기에 캘리포니아의 높은 인건비 등을 감안하면 미국에서 만들어진 김치가 한국산 김치보다 더 비쌀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대상아메리카가 일부 품목의 현지 생산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수입되는 김치는 제조 후 20일~1개월여 가 지나야 미국 매장에 도착한다. 현지 생산 김치와 맛이 다를 수밖에 없다. 방 공장장은 "수출용 김치는 발효를 늦추기 위해 원료를 달리 쓰지만 100% 제어하기는 어렵다"며 "그래서 신선한 김치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현지 생산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비용 측면에서는 중국산 김치와의 경쟁도 부담이다. 중국 기업들은 정부 차원에서 대규모 수출 보조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대상보다 가격 경쟁력에서 앞선다. 방 공장장은 "어떻게 보면 김치 시장은 레드오션"이라며 "그럼에도 우리는 '원래 한국 김치는 이런 맛이야'라는 것을 알리겠다는 사명감으로 전통 김치를 지속적으로 유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현지 생산을 위해서는 연구 인력이 필수다. 대상아메리카에는 한국 본사에서 파견된 연구원이 상주하고 있다. 한국과는 특성이 다른 현지 재료를 어떻게 사용할지, 현지인의 입맛에 맞는 김치를 어떻게 개발할지를 연구한다. 방 공장장은 "만약 상온 제품이면 샘플을 한국에 보내서 테스트하면 되는데, 김치는 신선식품이라 샘플이 한국과 미국을 왔다 갔다 하는 과정에서 변질될 수 있다"며 "또 나라마다 입맛이 다르기 때문에 '글로컬라이제이션'(현지화)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올해 히트한 오이김치도 현지 연구원과 공장이 협력해 개발한 제품이다. 그는 "이곳의 오이는 과일향 같은 게 느껴지면서 꼭지 부분의 떫은 맛이 적어 한국 오이와 맛이 조금 다르다"며 "이런 재료 특성을 반영해 최적의 맛을 갖춘 김치를 개발한다"고 밝혔다.
대상푸즈USA는 내년 김치 생산 목표를 올해보다 약 20% 더 높게 잡았다. 방 공장장은 "올해처럼 갑자기 극적으로 늘어나지는 않겠지만 신제품들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기존 제품도 조금씩 성장하면 20% 가량 생산량을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익숙해지면 맛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김치는 월마트, 코스트코, 타깃 등 주류 유통 매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런 주류채널에서 처음부터 저절로 김치를 받아준 것은 아니다. 대상아메리카가 수년간 공들여온 마케팅 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키 킴(Miki Kim) 대상아메리카 마케팅실장은 "주류 소비자들은 아직 한국 식재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익숙하지 않다"며 “결국 중요한 건 ‘익숙해지게 하는 과정’으로 일단 한 번 맛보면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고 말했다.
대상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마케팅 전략은 코스트코 로드쇼다. 킴 실장은 "코스트코 매장 안에서 5~6가지 김치를 전시하고 시식을 제공한다"며 "많은 사람들이 '김치가 그 자체로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소비자 대상 마케팅 외에도 바이어를 대상으로 한 트레이드쇼도 중요하다. 킴 실장은 "엑스포 웨스트(Expo West) 같은 식품 박람회에서 바이어들에게 신제품을 소개하고 새로운 제품 혁신을 선보이며 유통 담당자와 소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상아메리카는 김치를 알리기 위해 유명 셰프들과의 협업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유명 셰프 코리 리와 손잡고 그의 미쉐린 1스타 한식당 '산호원'의 이름을 딴 김치를 출시했다. 코리 리 셰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호원과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베누'를 운영하고 있다.
또 다른 스타 셰프인 성철 심과의 협업도 예정돼 있다. 성철 심 셰프는 미국 뉴욕에서 '코치' 등 4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스타 셰프다. 심 셰프의 레스토랑 중 한 곳에서 비빔밥 메뉴에 종가의 김치를 활용할 예정이다. 셰프 외에 대중적인 체인과의 협업도 주목할 만한다. LA 기반 샌드위치 브랜드 '락스타 치킨'은 종가 김치 토핑을 활용한 치킨 버거를 선보이는 중이다.
한인 통해 세계로
대상아메리카는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각지의 한인 축제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한인들에게는 김치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한국 음식을 널리 알리는 주역이 바로 한인 커뮤니티이기 때문이다. 킴 실장은 "대부분 사람들이 처음으로 한국 음식을 접할 때 '한국인 친구와 한 번 바비큐를 먹으러 갔다'는 경험을 이야기할 정도고 한국 커뮤니티가 한국 식재료를 활용하는 방법을 알리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며 "즉 한국 커뮤니티가 한국 음식 인지도 확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런 축제에서는 김치를 있는 그대로 즐기고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그는 "시장 조사 결과, 일반 소비자들은 대부분 김치를 요리 재료로 사용한다"며 "하지만 축제에서는 발효 채소로서의 맛과 건강 효능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김치 본연의 형태로 샘플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대상아메리카는 지난 16일부터 19일까지 진행된 미국 최대 한인 축제인 'LA 코리안 페스티벌'에도 처음 참여했다. 이 축제에서 대상은 오이김치, 맛김치 등을 주로 선보였다. 올해 축제 반응은 뜨거웠다. 킴 실장은 "이번 LA 코리안 페스티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며 "우리 팀이 시식용 컵과 샘플이 떨어져서 중간에 재고를 보충해야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한류 덕분에 한인 축제에 한인 외의 다양한 미국인들이 방문한다. 한인들과 어울리며 한국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셈이다. 킴 실장은 "우리는 한국 커뮤니티와 계속 소통하면서도 동시에 주류 소비자까지 도달하고 싶다"며 "한국 커뮤니티와 연결돼 뿌리를 잃지 않으면서 그 범위를 넓히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