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인상이라는 것이 경제주체들에게는 금융비용 부담으로 이어져 인기없는 정책이다. 자칫 타이밍을 놓치면 국가경제 전체적으로 훗날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함은 과거 정책운용의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얻은 교훈이다."
약 8년의 재임 기간을 단 9일 남긴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말이다. 23일 퇴임을 앞두고 연 기자간담회에서다. 그는 마지막까지 '통화정책 완화 정도를 줄여야 할 때'라는 말을 남겼다.
스태그플레이션(물가상승+경기침체) 우려가 커지는 데다, 윤석열 당선인이 꾸릴 새 정부의 출범이 두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라 의미심장하다. 정권 초기 정부의 정무적 판단이 정책조합(통화정책+재정정책) 연속성을 깨진 않을까 우려한 것이었을까?
"물가 상황 녹록지 않다"
그는 간담회 모두발언을 통해 "최근의 높은 물가 오름세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고 금융불균형 위험을 줄여나갈 필요성이 여전히 크다"면서 "통화정책의 완화정도를 계속 줄여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이어 "특히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Fed)가 빠른 속도의 금리인상을 예고했는데 우리가 지난 8월 이후 선제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잠시 금리정책 운용의 여유를 갖게 된 점은 다행이지만 앞으로의 상황은 녹록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장 경기 회복에 부정적일 수 있지만 금리인상 기조가 당분간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다만 속도나 횟수에 대해서는 여지를 남겼다. 지난달 금통위 때 올해 경제성장률을 3%, 물가상승률을 3.1%로 제시했는데 당시 전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해서는 전면전은 없을 거라고 가정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이미 유가, 곡물 등 원자재 가격이 급등했고 국내 수출기업 애로가 나타나는 게 현실"이라며 "아직 불확실하지만 상황 전개에 따라 물가에는 꽤 상승압력이 생기고 성장에도 부담을 주지 않을까 한다"고 봤다.
"취임 때보다 경기 나빠졌다"
이 총재는 지난 8년이 매우 다사다난했다고 회고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라고 되짚었다.
그는 △세월호 참사(2014년 4월16일) △메르스 사태(2015년 5월20일, 국내 첫 확진) △브렉시트(2016년 6월23일, 영국 국민투표) △미·중 무역갈등(2017년 8월14일, 트럼프의 중국 부당관행 조사 행정명령) △일본 수출규제(2019년 7월4일, 규제시행 시작) △코로나 위기(2020년 1월20일, 국내 첫 확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2022년 2월24일, 러시아 침공일) 등을 하나하나 들었다.
이 총재는 "그 기간동안 주재한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를 세어보니 통화정책방향 결정 회의만 총 76회이더라"며 "이중 고심없이 쉽게 이루어진 결정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높은 불확실성 아래, 예측 자체가 불가능한 비경제적 요인에 의한 사건들이 빈발하다 보니 적시에 정책을 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이 총재가 이끄는 금통위는 기준금리를 9차례 인하하고, 5차례 인상했다. 이 총재 임기중 최고 기준금리는 취임 당시인 2.5%였고, 코로나가 터진 2020년에 최저인 0.50%를 찍었다. 지난해 국내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고, 가계부채 증가와 자산 가격 급등이 심해지면서 작년 8월과 11월, 올해 1월 인상으로 1.25%까지 올려진 상태다.
그는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중 '금리인하 결정 횟수가 인상보다 많았다는 사실을 두고 정책 성향을 평가하는 것과 관련해 "태생적으로 매파, 비둘기파를 나누는 것은 맞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취임 때보다 금리가 아래 있다는 것은 재임하는 동안 경기 상황이 어려웠다는 얘기"라며 "적시에 올바른 결정 내리기 위해, 고민했고 최선의 결정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통화정책 실기 우려는 기우"
이 총재는 1977년 한은에 입행한 뒤 조사국장, 정책기획국장, 통화정책 담당 부총재보, 부총재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2012년 퇴임 후 연세대 교수로 재임하던중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 총재로 임명됐고, 4년뒤 2018년 문재인 정부에서 연임했다. 중앙은행에서만 꼬박 43년을 일한 '한은맨'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 후임 후보로 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담당 국장을 이날 지명했다. 윤석열 당선인측과 인선 협의 과정에 잡음을 내고 있지만, 이 후보는 한국은행법 상 국무회의 심의,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문 대통령의 임명을 받게 된다.
이 총재는 최근 우려됐던 인사 공백에 대해서는 "다음 금통위가 20여일 남았는데, 저의 전례를 비춰보면 다음 통화정책방향 결정 회의까지 취임도 가능해 보인다"며 "부득이 공백 발생하더라도 금통위는 합의제 의결기관이기 때문에 통화정책은 차질없이 수행될 걸로 생각한다. 통화정책의 차질이라거나 실기를 우려하는 건 기우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어 후임 총재 지명자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에는 "학식이라면 학식, 정책운영, 국제 네트워크 여러면에서 출중한 분"이라며 "저보다 훨씬 뛰어난 분"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재임기간중 마음에 새기고 다짐했던 것은 '중앙은행의 존립기반은 국민들로부터의 신뢰다'라는 것"이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아울러 "떠나는 자리에서 그저 덕담만 나누기에는 우리 경제가 헤쳐나가야 할 어려움이 너무 큰 것이 사실"이라며 "그러나 후임 총재와 한국은행 임직원들이 이러한 어려운 경제상황에 슬기롭게 대응해 나가리라 믿는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