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하나가 8년간 700억원에 달하는 돈을 빼다 쓰는 동안 우리은행은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금융감독원이 사고 직후 2개월 동안 검사로 밝힌 방만한 조직 운영이다. 사고 직원은 같은 업무를 10년 넘게 맡으면서 상급자의 직인을 빼쓰거나 암호기기를 도용하고, 심지어 파견나간 것처럼 속이고 1년 넘게 무단결근했지만 은행은 끝까지 알아채지도 못했다.
개인의 일탈이라지만 은행 내부통제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금융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관리·감독해야 하는 금융감독원 역시 책임에 자유롭지 않다. 금융당국은 향후 이 같은 거액의 금융사고 재발 방지를 위해 내부통제 개선방안 마련을 위해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700억 횡령했지만…10년 내부통제 없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4월 발생한 우리은행 직원 600억원대 횡령사고에 대한 검사결과를 26일 발표했다. 사고 발생을 보고받은 즉시 검사에 착수(4월28일)했고, 사고 원인 규명과 은행의 금융사고 내부통제 기능이 제대로 작동했는가 점검 대상이었다.
우리은행 직원 횡령사고는 기업개선부 소속 사고자가 은행이 보유 중이던 A사 출자전환주식, 은행이 채권단을 대표해 관리하고 있던 대우일렉트로닉스(대우일렉) 매각 계약금 등을 2012년 6월부터 2020년 6월까지 총 8회에 걸쳐 697억3000만원을 빼돌린 것이 혐의다.
최초 발생 당시보다 횡령액수도 늘고, 건수도 많았다. 사고 발생 초기 알려진 횡령액은 614억원 수준이었지만 조사가 진행되면서 700억원 가까이까지 늘었다.▷관련기사: 우리은행 수백억대 횡령사고…금감원 긴급검사 착수(4월28일)
횡령 규모가 커진 대우일렉트릭 지분 매각 계약금 건에 앞서서도 사고가 있었다. 이 직원은 한국예탁결제원 예탁관리시스템에서 A사 주식 출고를 요청한 후 탐장 공석 시 OTP(1회용 비밀번호 생성기)를 도용해 무단결재하고 A사 주식을 인출해 23억5000만원을 횡령했다.
또 대우일렉 지분 매각 진행과정에서 몰취한 계약금을 관리하면서 직인을 도용해 출금하거나 공‧사문서 위조로 614억5000만원을, 대우일렉 인천공장 매각 추진 과정에서 몰취한 계약금과 각종 환급금도 출금요청 허위공문을 발송해 지급받는 등의 방식으로 59억3000만원을 횡령한 것으로 확인됐다.
금감원은 이번 사고에 대해 개인 일탈을 주원인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대형 시중은행에서 8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700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횡령 사고가 발생한 것은 사고예방을 위한 내부통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사고자는 10년 이상 동일 부서에서 동일 업체를 담당했지만 명령휴가 대상에 한 번도 선정되지 않았다. 명령휴가는 금융사고 발생 가능성이 높은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임직원을 대상으로 일정 기간 휴가를 명령하고, 이 기간 회사가 휴가자 금융거래 내역과 업무용 전산기기 등 사무실을 수색하는 것이다.
이 직원은 2019년 10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파견 허위보고 후 무단결근한 사실도 드러났다. 과거 대외기관 TF 구성원으로 참석했던 것을 상급자에게 파견으로 거짓 구두보고 했는데, 1년 2개월의 긴 기간에도 은행 내부에서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또 은행의 대외 수‧발신공문 위조가 가능했고, 통장‧직인 관리자가 분리돼 있지 않아 정식결재 없이 직인을 도용해 예금을 횡령할 수 있었다. 횡령 중 수기로 문서를 결재받는 등 문서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지점감사나 이상거래 모니터링을 통해서도 횡령을 적발하지 못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이번 검사에서 확인된 사실관계 등을 기초로 법률검토를 거쳐 사고자와 관련 임직원 등의 위법 부당행위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며 "금융위원회와 함께 금융사고 예방을 위한 내부통제 개선방안 마련을 추진하고 사고예방을 위한 금융감독이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허술한 시스템 도마 위…금감원 검사 '무용지물' 지적도
이번 횡령사건 조사 결과는 우리은행의 내부통제 시스템이 허술함을 넘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금융권을 넘어 대중적으로도 충격을 안겼다.
사고자가 팀장 OTP를 훔쳐 출자전환주식 출고를 요청한 것뿐 아니라 담당 부서장 직인을 훔치거나 허위 공문을 작성해 은행장 직인을 사용하는 등 문서 관리도 허술했다.
사고자는 내부통제 시스템의 허술함을 이용해 대외 기관에 파견 가겠다고 허위 보고 후 1년 이상 무단결근하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했다. 무단결근 사실도 금감원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것으로 우리은행 측은 조사 초기 사고자가 파견 중인 것으로 믿고 해당 내용을 강조하기도 했다는 게 금감원 측 설명이다.
우리은행에 대한 검사를 진행했고 금융권 전반을 관리‧감독해야 하는 금감원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금감원은 개별 은행의 특정 사안을 정밀하게 들여다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지만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 이준수 금감원 부원장은 "수차례 우리은행에 검사를 나갔지만 횡령 사고를 적발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라며 "다만 금감원 검사가 개별 금융사의 모든 거래 내용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리스크 취약 요인 등 금융사 건전성과 내부통제 시스템이 작동하는지 등을 점검하는 것이어서 개별 사안에 대한 적발은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