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은행권의 손실흡수능력을 키우는 '강제수단'을 도입한다. 현재 은행이 쌓는 대손충당금이나 대손준비금이 부족하다고 판단될 경우 추가 적립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것이 골자다.
은행들은 고민이 깊어질 전망이다. 최근 은행이 호실적을 내면서 모기업인 금융지주의 배당을 늘려야 한다는 주주들의 목소리가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제도가 도입되면 금융당국이 은행 배당에 사실상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동안 강조해온 주주환원 정책에 제한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금융당국, 이제 은행에 '손실대비금' 추가적립 요구
26일 금융위원회는 은행권이 손실흡수능력을 확충할 수 있도록 특별대손준비금 적립요구권 도입, 예상손실 전망 모형 점검체계 구축 등을 위해 은행감독규정 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현재 규정에 따르면 은행들은 예상손실에 대해 회계기준에 따라 대손충당금을 적립하고 손실흡수능력을 위해 대손준비금을 적립해야 한다.
대손충당금은 대출채권이 회수되지 못할 가능성을 대비해 쌓아두는 돈이다. 재무상 '비용'으로 처리된다. 은행의 순익이 줄어드는 요인이다.
대손준비금은 대손충당금과 개념은 같다. 다만 적립 조건이 대손충당금과 약간 차이가 있다.
대손준비금은 금융당국이 예상하는 충당금 규모와 금융회사가 쌓아둔 충당금의 규모가 다를 경우 추가로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쌓는 돈을 의미한다. 다만 회계상으로는 '비용' 처리가 되지 않고 '이익잉여금'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순익 감소의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현행 은행업감독규정에는 대손충당금과 대손준비금의 최소 합산액은 대출채권의 건전성에 따라 최저적립률로 산출한 금액의 합계만 맞추면 된다. 추가 적립 여부는 금융회사가 자율적으로 진행해왔다.
금융당국의 이번 규정 개정은 이같은 구조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현행 제도를 유지하다 자칫 경기상황 악화 등에 따른 '탄력적 대응'이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에따라 당장 손익계산서에는 영향이 없는 '특별대손준비금 적립요구권'을 도입해 은행들의 손실흡수능력을 충분히 쌓을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는 계획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그동안 저금리 기조, 코로나19 지원조치로 국내은행 총여신은 증가한 반면 부실채권은 비율과 규모도 지속 감소하고 있는 추세"라며 "현재 대손충당금적립률, 부실채권비율 등 지표에 착시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에 선제적으로 은행권의 대손충당금과 대손준비금 적정성에 대한 평가를 금융감독원이 한 뒤 은행의 손실에 비해 적립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대손준비금 추가 적립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들 '배당 늘려야하는데 어쩌나…'
은행들은 금융당국의 이번 행보에 대해 겉으로는 동감한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고민도 많다. 금융권은 그동안 꾸준히 대손충당금 규모를 늘려오며 정책에 적극 호응했는데 '강제수단'이 도입된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또 금융당국이 이 제도를 통해 은행계열 금융지주들의 배당에 간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손준비금의 경우 '비용'이 아니라 '이익잉여금'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재무제표상으로는 실적감소의 영향으로 꼽히지 않는다. 하지만 당기순이익이 증가해도 대손준비금을 쌓아야 하는 규모가 늘어날 경우 그만큼 배당여력은 줄어들게 된다.
최근 몇년새 코로나19, 글로벌 공급망 쇼크 등 국내외 경제를 뒤흔드는 굵직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지만 금융지주들은 역대급 실적을 연이어 내고 있다.
2020년 국내 금융지주의 당기순이익은 15조1000억원 이었고 2021년에는 21조2000억원으로 40.2%나 늘었다. 지난해에도 금융지주들이 역대급 실적을 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지난해 순익이 25조원을 넘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에다라 최근 금융지주 주주들은 배당 확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관련기사 : "파산직전 수준에 거래중인 은행주, 비정상의 정상화 해야" 금융지주들 역시 호실적을 바탕으로 배당성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주가 상승 등을 꾀하겠다는 방침을 꾸준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핵심 계열사인 은행들이 대손준비금 추가적립으로 인해 배당여력이 줄어든다면 모기업인 금융지주의 배당 확대도 쉽지 않게 된다.
금융지주 관계자는 "그동안 주주들은 순익 증가에 따라 주가부양 등을 위해 적극적인 주주환원 정책을 펼칠 것을 요구해 왔다"며 "금융지주 역시 중간배당의 정례화, 자사주 소각 등을 통해 호응해 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만 금융당국은 배당확대에 보수적인 분위기"라며 "대내외적 상황을 감안하면 선제적 위기관리 차원이라는 명분은 있지만 배당과 관련이 있는 지점을 금융당국이 조절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면 내부나 주주들에게 불만이 나올 수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