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돈을 빌리는 방식이 조용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은행이 충분히 감당하기 어려웠던 기업대출과 인수금융, 대규모 인프라 투자의 일부를 이제 연기금과 보험사 등의 자금을 모은 사모대출(private credit) 펀드가 메우고 있다. 미국에서 본격화된 이 흐름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투자 붐을 타고 가속화됐고, 우리 금융시장에도 빠르게 밀려오고 있다.
은행은 예금을 기반으로 영업하고 엄격한 건전성 규제를 받기 때문에 대출 규모와 위험 인수에 제약을 받는다. 반면 사모대출 운용사는 금리와 만기, 담보, 재무약정을 개별 기업과 프로젝트의 특성에 맞춰 신속하고 유연하게 설계할 수 있다. 투자 규모가 크고 미래 현금흐름이 불확실할수록 이러한 맞춤형 자금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 변화는 단지 돈을 빌려주는 주체가 은행에서 펀드로 바뀌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은행은 대출 심사와 결제계좌, 운전자금 거래, 담보와 재무약정 관리를 통해 기업을 실사하고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한다. 이 과정에서 외부 투자자가 쉽게 얻기 어려운 기업고유 정보가 생산된다. 필자가 2018년 Journal of Financial Economics에 발표한 연구에서도 은행이 생산한 이러한 정보가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으로 전달되며 자본시장의 가격발견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였다.
사모대출 펀드도 차주를 실사하고 모니터링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생산된 정보는 소수의 운용사와 투자자 사이에 체결된 비공개 계약 안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은행대출에서 사모대출로의 이동은 정보가 사라지는 변화라기보다, 위험에 관한 정보가 시장과 감독당국의 시야에서 더욱 불투명해질 가능성을 높이는 변화다.
오늘날 사모대출은 상당 부분 연기금과 보험사 같은 장기 자금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예금자가 한꺼번에 돈을 인출하면서 발생하는 전통적인 뱅크런 위험은 상대적으로 작다. 그러나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위기가 나타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사모대출의 핵심 위험은 기업이 실제로 부담하는 경제적 의무가 여러 법인과 계약에 나뉘어 개별 장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데 있다.

이러한 문제는 AI 데이터센터 금융에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메타는 일부 데이터센터를 자신이 직접 차입해 건설하는 대신, 사모자본 운용사와 별도의 합작법인을 설립해 개발·소유하게 하고 이를 장기간 임차하는 구조를 택했다. 프로젝트 차입은 별도 법인에 남지만, 그 차입금을 갚을 재원은 상당 부분 메타가 지급하는 장기 임차료에서 나온다. 경우에 따라 메타는 프로젝트의 잔존가치나 계약 이행에도 일정한 경제적 책임을 부담한다.
개별 법인의 장부만 보면 부채와 위험이 여러 투자자에게 분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계약 전체를 펼쳐 보면 데이터센터의 경제적 가치는 결국 메타의 장기 지급 능력과 AI 사업 전망에 크게 의존한다. 법적으로 부채를 진 주체와 경제적으로 그 부채를 떠받치는 주체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간극에서 장부 밖 위험이 자란다.
오라클의 사례는 이러한 위험이 개별 기업을 넘어 기업 간 경제적 의존관계로 확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라클의 대규모 데이터센터 투자가 수익을 내려면 OpenAI 같은 고객이 약속한 미래 수요를 실제 매출과 현금흐름으로 전환해야 한다. AI 모델 기업으로 유입된 자금은 클라우드 사용료로 지급되고, 그 돈은 다시 데이터센터 건설과 반도체 구매에 사용된다. 앞 단계의 예상 수요가 뒤 단계 투자의 근거가 되고, 그 투자가 다시 앞 단계 기업의 성장 전망을 정당화한다.
문제는 이 고리들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AI 모델 기업과 클라우드 사업자, 반도체 기업, 데이터센터 개발업자와 이들에게 자금을 공급한 투자자는 모두 AI 수요가 장기간 빠르게 증가할 것이라는 하나의 전망에 연결돼 있다. 각 기업의 재무제표만 보면 위험은 분산된 듯 보이지만, 경제적으로는 동일한 미래 현금흐름에 여러 기업과 투자자가 함께 기대고 있는 셈이다.
필자가 같은 해 Journal of Accounting and Economics에 발표한 연구에서 보였듯이, 금융시스템의 위험은 개별 기관이 얼마나 튼튼한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기관들이 어떤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지에 따라 한 곳의 충격이 다른 곳으로 확산되고 시스템 전체의 위험이 커질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S&P글로벌의 오라클 신용등급 강등은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한 기업의 신용 문제를 넘어 AI 생태계의 계약 사슬에 축적되는 부담을 알리는 조기 경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해는 없어야 한다. 이것은 AI라는 기술이 실패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닷컴 거품이 꺼진 뒤에도 인터넷은 경제의 근간이 됐다. AI 역시 장기적으로 산업과 경제의 기반 기술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기술의 장기적 성공과 현재 이루어지는 모든 투자 및 기업가치 평가의 정당성은 별개의 문제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었다고 해서 닷컴 시대의 모든 투자가 정당했던 것은 아니다.
오늘의 장기 계약과 대규모 설비투자가 지나치게 낙관적인 수요 전망에 기대고 있다면, 기대가 현실에 맞춰 조정되는 과정은 결코 부드럽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연기금과 보험사도 국내외 사모대출과 데이터센터를 포함한 대체투자 노출을 확대해 왔다. 그 자금의 상당 부분은 국민의 노후와 보험금을 떠받치는 돈이다. 그러나 우리의 금융감독은 여전히 은행은 은행대로, 보험사는 보험사대로, 자산운용사는 자산운용사대로 나뉜 칸막이 안에서 건전성을 살피는 경향이 강하다.
개별 기관의 장부가 건강하다고 해서 금융시스템 전체가 안전한 것은 아니다. 여러 기관이 서로 다른 상품과 법인을 통해 투자했더라도, 그 수익이 동일한 기업의 임차료나 구매약정, 미래 매출에 의존한다면 경제적으로는 같은 위험을 떠안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감독체계에서는 이러한 계약의 그물 전체를 한눈에 보기 어렵다.
이제 감독의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과거에는 '누가 얼마를 빌렸는가'가 중요했다. 앞으로는 '누가 누구의 미래 현금흐름에 기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은행대출과 사모대출, 프로젝트 금융, 장기 리스, 잔존가치 보증, 최소 구매약정을 하나로 연결해 기업별 경제적 노출을 파악해야 한다. 특정 기업이나 산업의 수요 전망이 하향 조정될 때 그 충격이 어떤 기업과 금융기관, 투자자에게 동시에 전달되는지도 살펴야 한다.
지난 시대의 금융안정이 각 금융기관의 장부를 감독하는 일이었다면, AI 시대의 금융안정은 장부 밖에 존재하는 계약의 그물과 그 안의 경제적 의존관계를 읽어내는 일이다. 위험은 언제나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란다. 다음 위기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장부가 아니라, 장부와 장부 사이를 연결해 보는 눈이다.
(Jongsub Lee, Andy Naranjo, and Guner Velioglu, "When do CDS spreads lead? Rating events, private entities, and firm-specific information flows," Journal of Financial Economics 130, no. 3 (2018): 556–5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