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이미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 내수 부진과 함께 수출도 감소하고 있다.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두 축이 흔들리면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내년 경제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전망이 많다. 대기업들은 한계사업을 재편하고, 인수합병에 나서는 등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주요 기업들이 처해있는 상황과 변화의 움직임, 정부의 대응 등을 짚어본다. [편집자]
대마불사(大馬不死). 과거에는 그랬다. 덩치를 키워놓으면 문제가 생겨도 어떻게든 해결방법이 생겼다. 정부나 채권단이 나서서 어려움을 해결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다. 외환위기 당시 수많은 대기업들이 사라졌고, 금융위기를 거치며 또 적지않은 기업들이 없어졌다. 최근만 해도 동양과 STX 등이 해체됐다.
한국 산업의 성장을 주도한 대기업들은 현재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얼마나 경쟁력을 갖췄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시대를 맞고 있다. 최근 대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사업재편이나 인수합병 등에 나서고 있는 것도 바로 생존을 위해서다. 저성장 국면이 이어지고, 해외에서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환경이 전개되고 있다.
◇ 삼성발 사업재편 확산
최근 재계의 관심은 삼성의 변화다. 과거 삼성은 계열사 매각이나 외부기업 인수합병에 보수적이었다. 신사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 분야에 진출해 그룹 역량을 투입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삼성만의 문화를 강조한 점도 외부 인수합병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다.
하지만 삼성이 변하고 있다. 경영권 승계를 위한 잇딴 사업재편이 마무리되면서 본격적으로 체질관리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삼성은 두차례 빅딜을 통해 방산과 화학사업을 완전히 정리했다.
삼성은 지난해말 한화그룹에 삼성테크윈과 삼성탈레스, 삼성종합화학과 삼성토탈을 매각한데 이어 최근 삼성SDI 케미칼부문,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을 롯데그룹으로 넘겼다. 총 거래규모만 5조원에 육박한다.
삼성의 빅딜은 그룹내 한계사업을 정리하고, 주력사업을 재편하기 위한 차원이다. 삼성의 사업은 이제 전자와 금융, 건설·중공업, 서비스 등으로 줄었고, 바이오 등을 신사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상태다.
이 과정에서 이재용 부회장 특유의 '실용주의'가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 관계자는 "사장단 정기인사와 조직개편 등을 앞두고 있는 만큼 그 이후 적지않은 변화들이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삼성의 사업을 가져온 한화와 롯데는 기존 사업의 덩치를 키우는 효과를 거뒀다. 한화는 방산과 화학 분야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했고, 롯데 역시 석유화학 부문에서 범용부터 고부가가치 제품까지 라인업을 강화했다. 삼성과 한화, 롯데의 빅딜은 서로의 생존을 위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의 변화가 다른 대기업들에 주는 의미는 상당하다"며 "특히 그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다는 점은 삼성 조차도 현 상황을 버거워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 변화는 계속된다
삼성 외에도 대규모 인수합병은 이뤄지고 있다. 롯데와 한화 외에 최근 SK텔레콤은 CJ헬로비전을 인수하며 관련업계를 놀라게 했다. SK텔레콤은 이번 인수를 통해 통신은 물론 방송까지 아우르는 플렛폼 사업자로 입지를 다졌다. 그룹내 최고경영진들이 모여 '파괴적 혁신'을 강조한 바로 다음날이다.
지난 상반기 합병을 통해 지주회사 체제를 완성한 SK는 지배구조에도 변화를 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현재 SK텔레콤 자회사인 SK하이닉스를 지주회사인 SK의 자회사로 만들어 지배력을 높이고, 투자나 인수합병 등을 보다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 것이란 분석이다.
그룹내 사업에 대한 재편도 이뤄지고 있다. LG그룹은 최근 LG화학의 OLED조명사업을 LG디스플레이로 매각하며 사업을 일원화했다. OLED 개발부터 제품화까지 LG디스플레이가 역량을 집중하라는 의미다. OLED와 함께 신사업으로 분류되는 자동차부품 분야도 이미 LG전자 산하 VC사업부로 교통정리한 상태다.
LG전자가 가지고 있던 하이로지스틱스를 LG상사 산하 범한판토스로 보내 그룹내 물류사업도 하나로 합쳤다. LG그룹은 최근 임원세미나에서, 주력사업인 필름분야를 과감히 정리하고 신사업을 추진한 일본 후지필름의 성공사례를 공유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그룹내 크고 작은 사업들을 통합하는 작업들이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현대차그룹은 이미 현대제철과 현대하이스코를 합병해 철강사업을 강화했고, 포스코도 부실 자회사들을 대거 정리중이다. 태양광사업을 육성중인 한화그룹도 한화큐셀과 한화솔라원을 합병하며 규모를 키운 상태다.
삼성의 빅딜은 물론 주요 대기업들의 사업재편과 인수합병 등의 움직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란 전망들이 많다. 세계 경제 불확실성이 점차 높아지고, 주요 수출국인 중국의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한국기업들의 설 자리가 점차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처럼 사업만 펼쳐두면 성장하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며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당분간 생존을 위한 자발적인 사업재편, 인수합병 등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 인력조정 등 진통도 잇따라
최근 이뤄지고 있는 이른바 자율빅딜의 특징은 '선택과 집중'으로 요약된다. 아예 경쟁력을 잃은 사업에 대한 조정이 아닌 성장 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삼성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방산과 화학의 경우 삼성그룹 내부에서는 전자나 금융 등에 밀려있는 분야지만 여전히 성장 가능성이 있는 분야다. 지난해 삼성과 한화의 빅딜이 이뤄졌을 당시 내부에서 '용 꼬리보다 뱀 머리가 낫다'는 반응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롯데가 가져간 화학사업 역시 삼성 내부보다 롯데케미칼과의 결합을 통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평가다. 삼성과 롯데 양측에서 '윈윈사례'를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이다.
다만 이같은 빅딜이후 합병 회사 간 화학적 결합이 이뤄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란 전망이다. 실제 결합과정에서 진통도 불거지고 있다. 한화로 넘어간 한화종합화학(옛 삼성종합화학)이 노사갈등 끝에 파업에 이은 직장폐쇄까지 이어지는 등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롯데로 매각되는 삼성정밀화학은 일단 노사 비상대책위원회에서 환영의 뜻을 표하면서도 고용과 처우보장 등의 항목을 담은 성명서를 내놓은 상태다. 투쟁보다는 협상을 선택했다는 측면에서 한화의 사례보다는 낫지만 급여 격차 등 현실적인 문제들이 존재하는 만큼 인수자인 롯데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따라 향후 상황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사업재편에 따라 조직과 인력 구조조정 등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직원들로서는 상당한 부담이다. 특히 빠르게 사업과 조직재편이 이뤄지고 있는 삼성의 분위기는 어수선한 상황이다. 삼성 관계자는 "최근 몇년간 수시로 인력조정들이 이뤄졌지만 최근들어 강도가 더 높아지는 분위기"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