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수입 철강에 대한 강력한 보호무역 조치를 결국 현실화했다. 철강에는 25%, 알루미늄에는 10%의 관세를 각각 부과토록하는 제재안을 확정해 당장 이달 말부터 발효키로 한 것이다. 한국도 관세 제재 폭탄을 피하지 못했다. 한국산 철강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작년 9.9% 였고, 한국 철강 수출에서 미국이 점하는 비율은 12.1%였다.
◇ 트럼프 "위협 해소할 카드 들고 오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8일(현지시간) 오후 백악관에서 철강 업계 노동자와 노동조합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자국산업 보호 명목의 '미국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한 '철강·알루미늄 규제조치' 명령에 서명했다. 이 조치는 대통령 서명 15일 후 발효된다.
이번 조치는 전면적으로 수입 철강에 25%, 알루미늄에 10%의 관세를 부과토록 하는 게 골자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으로 묶여 있는 캐나다와 멕시코, 미국이 무역수지 흑자를 내고 있는 호주 등만 관세 조치 대상국에서 제외됐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 등 미국과 '동맹'이라 여겨졌던 대다수 국가들이 관세 대상국에 포함됐다.
■ 미국 무역확장법 232조(Section 232 of the Trade Expansion Act)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 대통령 직권으로 수입제한이 가능하도록 규정한 무역 제재수단이다. 미국 상무부는 특정 수입품이 자국 안보에 해를 끼칠 수있다는 우려가 있을 때 해당 품목에 대해 조사해 그 결과를 270 일 이내에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대통령은 90일 동안 조사 결과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결정하고, 법정 권한에 따라 조치한다.
조치에는 추가 관세 부과, 수입 물량 제한뿐 아니라 세이프가드(긴급 수입제한)까지 허용하고 있어 보호무역 조치 수위에 다라 해당 산업 타격이 클 수 있다. 이 조항은 1962년 제정 후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효력이 사라졌지만 지난해 4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부활했다. |
지난 1월 미국 상무부는 철강 및 알루미늄에 관한 무역확장법 232조 보고서를 백악관에 전달했다. 이어 지난달 "국가 안보를 해칠 우려가있다"고 결론을 낸 이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에는 미국 철강 수입이 수출의 거의 4배에 달하며, 알루미늄 수입이 1차 알루미늄 수요의 90%라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 철강 및 알루미늄 산업 장기 생존 가능성을 보호하기 위해 대통령이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권고가 결론이다.
트럼프는 이날 서명식에서 "미국 산업이 외국의 공격적인 무역관행들에 의해 파괴됐다. 그것은 정말 우리나라에 대한 공격"이라며 "우리를 나쁘게 대우한 많은 나라가 동맹이었다"고 말했다. 통상마찰에 대해서는 아군과 적군 구분 없이 대응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는 다만 관세 대상국과 관련해 "대미 수출이 미국에 가하는 위협을 해소한다면 면제 협상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향후 양자 간 협상을 거쳐 면제국을 추가할 수 있다는 뜻이다. 트럼프는 서명 전 각료회의에서도 "우리는 매우 공정할 것이고, 매우 융통성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한국 기업이 현지 투자를 통해 미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 '한국산 철강이 미국의 안보와 경제에 전혀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논지로 미국 행정부와 의회 인사들을 설득해 왔지만 면제 대상이 되지 못했다. 캐나다와 멕시코 경우 일단 '관세 폭탄'을 피하게 됐지만 향후 나프타 재협상 과정에서 철강관세에 대한 특혜가 협상 카드로 이용될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다.
◇ '보호무역 통상전쟁'..이게 시작일까
미국은 조강 생산 세계 4위 '철강대국'. 그러나 철강 사용량이 훨씬 더 많아 세계 1위 철강 수입국에 올라 있다. 지난해 총 수입량은 전년보다 15.1% 증가한 3447만3천톤(291억3800만달러)였다.
수입 대상국별로는 캐나다가 가장 많은 567만6000톤이었고, 이어 브라질이 466만5000t으로 2위, 한국이 340만10000톤으로 3위였다. 한국산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9.9%였다. 이어 멕시코(315만5000톤), 터키(197만8000톤), 일본(172만8000톤) 순이다. 수년 전부터 반덤핑 관세 등 집중적 수입 규제 조치를 받은 중국은 74만톤으로 11위에 그쳤다.
한국철강협회에서는 지난해 우리나라 철강의 대미 수출이 총 354만톤으로 전체 수출규모 11.2%라고 집계하고 있다. 포스코경영연구소(POSRI)에 따르면 내년 미국 철강수요는 9730만톤으로 전세계 수요 16억2700만톤의 6% 수준이다.
▲ 집무실에서 서명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 백악관) |
철강업계는 일단 대미 수출에 큰 차질이 있을 것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은 우리나라가 수출하는 철강재의 88%에 이미 반덤핑·상계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 상태다. 이 탓에 작년 대미 철강 수출은 고점인 2014년 대비 약 38% 감소했다. 여기에 25%에 해당하는 관세가 추가되는 것이다.
철강업계에 따르면 포스코 경우 현재 냉간압연강판 66.04%, 열연강판 62.57%의 관세를 내고 있어 25%를 더하면 관세율이 각각 91.04%, 87.57%로 오른다. 현대제철도 냉간압연강판 기존 38.22% 관세에 25%를 추가해 63.22%의 관세를 부담해야 한다. 유정용 강관(OCTG) 수출의 미국시장 의존도가 큰 넥스틸, 휴스틸, 세아제강 등도 도 70% 안팎의 관세를 부담해야 한다.
업계는 앞으로 미국과 진행될 정부 협상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다. 15일 후 발효까지 협상 여지가 있는 만큼 부과율을 낮추거나 일부 품목만이라도 제외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날 정부와 철강업계는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통상차관보 등이 참석하는 민관대책회의를 가지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정부는 한국산 철강재에 대한 관세 경감(또는 면제)을 위해 미국 무역대표부(USTR)와 관련 협의 진행하고, 철강업계는 미국 현지 수요기업, 투자기업 등과 함께 품목 예외(exclusion) 확보를 위해 뛰는 '투 트랙' 대응이다. 정부는 일단 관세 면제를 위해 끝까지 노력하겠지만 이게 통하지 않을 경우 유럽연합(EU) 등 주요국과 공조해 미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키로 했다.
일본 역시 자국도 관세부과 대상국에 포함된 것에 당혹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간 동맹관계를 생각하면 제외 대상이 될 법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도 양국 관계를 강조하며 협상에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산업계에서는 제재 대상국들이 보복조치에 나설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자유무역체제가 흔들리면서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더 큰 문제는 무역제재가 미국, 철강산업에 그치지 않고 도미노처럼 다른 국가권역, 다른 산업으로 퍼져나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