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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혁신]마피아 아닌 '시민'이라야 산다

  • 2019.05.22(수) 09:57

[창간6주년 특별기획]
벤처 오디션 현장에서 엿본 포스코의 변신
'그들만의 리그' 오명 벗으려 1조 투자도 '선뜻'
"상생이 곧 신성장"…벤처생태계 조성 빅픽처

"이거 하나 구입해 장관님 차에 놔드려야겠네요."(최정우 포스코 회장)
"아휴 '김영란 법'도 있는데 그러시면 큰일 납니다."(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왼쪽서 두번째)과 최정우 포스코 회장(오른쪽서 두번째)이 벤처기업 퓨먼의 제품 시연을 보며 웃고 있다./사진=윤도진 기자 spoon504@

뇌과학과 한의학을 접목한 신개념 제품을 선보인 한 벤처기업 부스앞에서 두 VIP(최고위 주요인사)가 화기애애하게 농담을 주고 받았다. 헤드폰 모양의 기기를 머리에 쓰면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나오며 귀에 있는 미주신경 점혈을 지압하는 '브레인 테라피' 제품을 들고 나선 퓨먼이란 벤처다.

자신의 제품을 두고 대화가 술술 풀리자 벤처 기업인도 들떴다. 이 회사 서영주 상무는 "작년말 첫 제품을 양산해 이제 막 판매를 시작했는데 여기 와서 이런 반응을 들으니 힘이 난다"며 "이번 행사를 계기로 포스코나 다른 투자자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면 후속 두피케어 신제품을 출시하는 데도 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 포스코가 판 벌린 벤처기업 오디션

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포스코센터 로비는 아침부터 북적였다. 이날 오후 열리는 포스코의 '아이디어 마켓 플레이스(IMP)'라는 행사 때문이었다. 벤처기업들의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육성하자는 포스코의 대표 상생 프로그램이다. 참가한 벤처들은 직접 사업설명에 나서 투자자에게 매력을 뽐냈다. 포스코판 '벤처기업 오디션'이다.

이 행사는 2011년부터 매해 두 차례씩 열려 이번이 17회째였다. 하지만 예년과는 크게 달랐다. 포스코만의 사업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정부도 거들고 나섰고 행사 규모도 확 커졌다. 일자리 창출과 경기 부양에 안간힘을 쓰는 정부로부터 대기업의 상생(相生) 본보기로 공인 받은 셈이다.

포스코는 이번 행사를 넉달 전부터 준비했다. 2월초 공모작업을 거쳐 선발된 벤처들을 대상으로 육성 컨설팅 지원을 시작했다. 준비기간중 2박3일간 합숙까지 시켜가며 후보 벤처들의 사업 방향과 기업설명 포인트를 가다듬는 데 도움을 줬다. 작년 말 조직개편에서 포스코에 새로 생긴 산학협력실이 주관해 종전보다 더 힘을 실었다.

21일 열린 17회 포스코 아이디어 마켓 플레이스에서 벤처기업 텐일레븐 이호영 대표가 '최우수스타트업상'을 수상하고 있다./사진=윤도진 기자 spoon504@

이날 본선에 오른 벤처는 16곳. 대부분이 포스코와는 연관이 거의 없는 사업을 들고 나왔다. 심사위원들이 뽑은 '최우수스타트업상'은 텐일레븐(대표 이호영), 참가자들이 직접 뽑은 '최우수아이디어상'은 헬스앤매디슨(대표 김현욱)이 차지했다.

텐일레븐은 인공지능으로 30분안에 2000가구 규모의 재개발 사업 타당성을 분석할 수 있는 건축설계 솔루션을, 헬스앤메디슨은 차세대 전자의무기록(EMR) 시스템에 기반을 둔 스마트 동물병원 사업을 선보였다.

각각에는 500만원의 지원금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들에게 더 큰 소득은 투자자 기관들로부터의 관심, 특히 벤처 육성에 힘을 싣겠다는 포스코의 투자 의향이었다.

# 벤처 육성에 1조 던지는 이유 

이날 포스코는 벤처기업 육성에 1조원을 투자하는 '포스코 벤처플랫폼' 운영계획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또 이를 함께 운영할 중소벤처기업부, 한국벤처캐피탈과 업무협약도 맺었다.

포스코의 오규석 신성장부문장이 소개한 포스코 벤처플랫폼의 골자는 이렇다. 스타트업과 벤처기업들이 연구, 투자유치 및 기술교류 등을 유기적으로할 수 있는 '벤처밸리'를 만들고 국내외 유망 기술벤처기업 등에 투자하는 '벤처펀드'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포스코는 2024년까지 벤처밸리에 2000억원, 벤처펀드에는 8000억원을 투자키로 했다.

벤처벨리는 신사업 유망분야 중심으로 포항, 광양 등을 벤처기업 연구개발(R&D)거점으로 육성하는 계획이다. 포스텍과 연계한 3세대 가속기 기반의 소재·에너지·환경연구, 4세대 가속기를 기반으로한 바이오·신약개발, 스마트시티·스마트팩토리 조성 사업이 3대 축이다. 벤처펀드는 외부투자 1조2000억원을 더 유치해 총 2조원 규모로 조성하고 운영한다.

17회 포스코 아이디어 마켓 플레이스 참가자들과 관계자들이 단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포스코의 벤처펀드는 정부가 지난 3월 발표한 '제2 벤처붐 확산 전략'에 부응한 것이다. 정부는 벤처 투자 및 M&A(인수합병) 활성화를 위해 대기업, 금융사 등이 전략 벤처투자 모펀드를 조성하면 운용 자문, 세제혜택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포스코 최 회장은 "미래의 성장을 견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 스스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이를 상업화하는 것"이라면서 "포스코는 1조원 규모의 투자재원으로 선순환 벤처플랫폼을 구축해 스타트업이 유니콘으로 성장하기까지 벤처기업의 생애 전주기를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팽창이 당연시되지 않는 경제환경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낯선 상황"이라며 "우리 경제가 국민소득 3만달러의 깔딱고개를 넘어 4만달러, 5만달러 시대로 가려면 구조를 바꾸는 상생, 공존, 연결의 힘이 필요하다"고 맞장구 쳤다. 이날 포스코는 청년창업 및 벤처기업 등을 지원해온 상생활동을 인정받아 중소벤처기업부의 제2호 '자상한 기업(자발적 상생기업)'으로 선정됐다.

# '포피아' 벗고 '1등 기업시민'으로

1조원은 포스코로서도 획기적인 투자규모다. 한 분기 영업이익과 맞먹는 거액이다. 포스코가 지금껏 아이디어 마켓 플레이스라는 장을 통해 벤처에 직접 투자한 금액은 2011년부터 작년까지 87개사에 147억원. 기간은 다르지만 올해부터 5년간 이의 70배 가까운 투자금을 벤처 육성에 쏟아붓겠다는 것이다.

이런 과감한 시도는 작년 7월 최정우 회장이 포스코의 수장으로 앉은 후 생긴 변화중 하나다. 최 회장은 취임 때부터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이라는 개념을 경영이념 중심에 들고 나섰다.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포스코의 신성장동력을 만들어 또다른 주력으로 키워야 한다는 의지가 더해졌다.

포스코는 왜 이렇게 기업시민으로 불리는 데 목을 맬까? 최근 1~2년 사이 일어난 포스코의 회장 교체 과정과 이후 회사의 변화를 지켜본 이들은 이를 '마피아 게임'에 빗댄다.

"둘러앉은 10명 중 2명은 '마피아'다. 마피아는 자신이 마피아라는 것을 철저하게 감춰야 게임에서 이긴다. 나머지 시민들은 본인이 마피아가 아니라 는 것을 증명해야 산다. 그렇지 못하고 지목되면 처형된다. 자신은 숨어 있는 범법자가 아니라 진짜 시민이라고 다른 참가자들을 설득해야 이 게임에서 살아남는다.

포스코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돈 잘버는 사익추구 행위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사회에 얼마나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구성원들 앞에 입증해야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탐욕스러운 마피아가 아니라 시민이라는 걸 보여줘야 산다."

'국민기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장 교체 과정에서 '포피아(포스코 마피아)' 논란으로 흔들리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좌표가 '기업시민'인 셈이다. 포스코 한 직원은 "'그들만의 리그' 안에 있다는 인식을 벗어내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했다.

'기업시민, 위드 포스코(With POSCO)'라는 포스코의 변화는 아직 시작단계다. 포스코는 최 회장 취임 1주년이 되는 오는 7월 기업활동의 준칙이 될 '기업시민 헌장'을 내놓을 예정이다. 회장 직속 자문 기구인 기업시민위원회가 구성돼 지난달 첫 회의를 열어 결정한 사안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임직원들부터 기업시민의 개념과 중요성을 이해하고 실천력을 높이기 위해 기준을 정해두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혁신(革新). 묵은 제도나 관습, 조직이나 방식 등을 완전히 바꾼다는 의미다. 과거 한국 기업들은 치열한 변화를 통해 성장을 이어왔고, 유례를 찾기 힘든 역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성장공식은 이미 한계를 보이고 있다. 성장이 아닌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로 몰리고 있다. 비즈니스워치가 창간 6주년을 맞아 국내외 '혁신의 현장'을 찾아 나선 이유다. 산업의 변화부터 기업 내부의 작은 움직임까지 혁신의 영감을 주는 기회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시점. 그 시작은 '혁신의 실천'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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