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쇼핑이 롯데ON의 신임 대표로 나영호 이베이코리아 전략기획본부장을 내정했다. 외부 인사가 롯데그룹 유통계열사 대표를 맡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업계에서는 롯데의 이 같은 변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다만 롯데가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적 쇄신에 앞서 롯데 조직 내부의 유기적 변화가 우선적으로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 롯데 잘 아는 '이커머스 전문가'
롯데그룹은 최근 롯데ON의 새 대표로 나 본부장을 내정했다. 신임 나 대표는 이베이코리아 퇴직 절차를 마무리한 뒤 다음 달쯤 롯데ON을 이끌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롯데그룹 광고 계열사인 대홍기획에서 근무했다. 당시 대홍기획은 국내 첫 이커머스 사업 도입을 추진했다. 평소 이커머스 시장에 관심이 많았던 나 대표는 대홍기획에서 이커머스를 경험한 후 롯데닷컴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이후 2007년부터 이베이코리아에 근무하며 G마켓 신규사업실장 등을 거쳐 최근까지 전략기획본부장으로 일했다.
그는 이베이코리아에서 간편결제 시스템인 '스마일페이' 사업을 주도했다. 또 현대카드와 협업해 사업자 표시 신용카드(PLCC) '스마일카드'도 내놨다. 현대카드와 협업한 스마일 카드는 출시 2년 만에 가입자 수 1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 서비스는 충성고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서비스로 자리잡으며 '록인(Lock-in) 효과'를 불러왔다. 실제 스마일페이는 사용자 수는 1500만 명 규모로 성장하며 이베이코리아의 '킬러 콘텐츠'로 자리잡았다.
롯데쇼핑의 나 대표 영입은 롯데ON 실패에 따른 위기감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오프라인 유통에서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온라인과의 시너지를 외치며 출범한 롯데ON은 기대 이하의 실적을 거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롯데ON의 지난해 거래액은 7조 6000억 원으로 7% 가량 성장했다. 수치상으로는 성장한 듯 보이지만 같은 기간 이커머스 시장 전체 성장률 19.7%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실패로 봐도 무방하다. 반면 신세계 SSG닷컴의 지난해 거래액은 전년 대비 37% 성장했다.
롯데쇼핑은 이커머스 전문가인 나 대표를 선임해 '반전'을 모색하고 있다. 오프라인 유통 전성기에 경력을 쌓아 온 내부 인력의 힘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는 분석이다. 나 대표의 경우 과거 롯데그룹에 몸담은 적이 있었던 것도 영입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롯데의 내부 사정은 물론 조직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만큼 본인의 구상을 보다 능동적으로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 '첫 외부인 대표' 두고 설왕설래
업계에서는 나 대표의 선임이 롯데가 그동안 지녀왔던 보수적인 기업 문화를 깨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롯데그룹은 그동안 안정성·수익성을 중시한 나머지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그 탓에 '실기(失期)'한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온라인으로의 빠른 전환이다. 따라서 롯데가 나 대표를 영입한 것은 그동안의 '구습(舊習)'을 깨고 새롭게 태어나려는 첫 시도라는 분석이다. 특히 실무자급 영입에 이어 대표급 인사까지 새로 합류하는 만큼 더 큰 변화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가 많다.
업계 관계자는 "롯데가 그동안 내부 인력을 승진시키는 방식으로 인사를 운영해 왔던 만큼 이번 나 신임 대표 선임이 가지는 의미가 더욱 크다"며 "내부 임직원들에게 온라인 시장 실패에 대한 경각심을 깨닫게 하고 이를 바꿔 나가겠다는 의사 표시다. 앞으로 공격적으로 변화를 추진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계열사별 경쟁 구도가 고착화된 롯데그룹 내 유통계열사의 사업 구조와 보수적 조직 문화를 사업부 대표 한 명이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롯데ON의 실패 원인 중 하나로 '표면적인 반쪽 통합'을 꼽고 있다. 외부 통합은 이뤄졌지만 경쟁 구도 속 유기적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다는 평가다. 이에 롯데ON이 독자적 사업부라기보다는 각 계열사의 상품 판매를 중개하는 수준에 머물러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런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에는 시작부터 한계가 명확했다는 이야기다.
내부 반발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롯데쇼핑은 이베이코리아 인수전에 뛰어든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이베이코리아 출신인 대표를 선임한 저의가 무엇이냐는 의견이 나온다. 실제로 롯데그룹 내 일선 직원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불만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 대표의 영입이 핵심 인사 영입 선에서 혁신을 마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결국 롯데가 진정으로 변화하기 보다는 단순히 인적 쇄신을 통해 외형적으로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구태(舊態)'를 그대로 가져가고 있다는 비판인 셈이다.
◇ 혁신은 '내부'에서부터
업계에서는 나 대표 체제의 롯데ON이 반전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롯데쇼핑 전반의 조직문화 혁신이 선행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단순히 계열사 대표의 역할을 떠나 통합과 혁신의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를 위해서는 신임 나 대표와 롯데ON에 대한 그룹 차원에서의 전폭적 지원이 필요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를 통해 나 대표 체제에 대한 그룹 내외부의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 우선이라는 설명이다.
롯데쇼핑에 앞서 외부인 대표를 선임한 바 있는 이마트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마트는 지난해 창사이래 최초로 외부인 CEO인 강희석 대표를 선임했다. 당시에도 업계 등에서는 그동안 이마트가 내부 인사 위주의 인사 정책을 펴 온 만큼 조직 내부에 상당한 파장이 일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내부에서 첫 외부인 CEO에 대해 강한 반발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강 대표에 대한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꾼 것은 정용진 부회장의 적극적 지원이었다. 정 부회장은 강 대표가 취임 초기부터 삐에로쑈핑, 부츠 등 전문점 구조조정에 나설 때 이에 힘을 실으며 조직에 긴장감을 줬다. 삐에로쇼핑과 부츠 등은 모두 정 부회장이 직접 야심차게 추진했던 사업들이었다. 이를 신임 강 대표가 정리하려할 때 만류하기 보다는 오히려 힘을 실어줬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는 의견이다.
강 대표가 주도한 이마트는 정 부회장과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지난해 역대 최대 매출을 달성했다. 더불어 코로나19 확산으로 움츠러들었던 수익성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강 대표가 성과를 내자 정 회장은 다시 SSG닷컴의 대표직까지 맡기며 더욱 신뢰했다. 이로써 강 대표는 신세계의 온·오프라인을 모두 총괄할 수 있게 됐다. 강 대표 체제의 신세계 온·오프라인 사업은 현재 순항 중이다. 이런 그룹 수뇌부 차원에서의 통 큰 지원이 나 대표에게도 주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업계 관계자는 "롯데가 오랫동안 튼튼한 인프라와 업계를 선도해 온 경험에도 불구 이커머스 시장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대표의 리더십보다는 구조적 문제점에서 찾아야 한다"면서 "외부인 대표를 선임해 조직에 긴장감을 주는 것도 좋지만 대표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조직 내부적 혁신도 함께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