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제철 등 철강업계가 최근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겠다고 나선 행정제재는 공정거래위원회가 7개 철강사를 상대로 철근의 원재료로 사용되는 철스크랩(고철)의 구매 가격과 시기를 합의했다며 3001억원을 과징금으로 부과한 처분이다. 이 과징금은 공정위 역대 4번째 규모이자, 이번 정부 출범 이후 최대였다. ▷관련기사: 현대제철-동국제강, 공정위 상대 잇단 소송(5월26일)
공정위는 3년 전에도 철근 판매가격을 담합했다며 6개 철강사에 1194억원의 과징금 처분을 내렸다. 현대제철, 동국제강, 한국철강, 와이케이스틸, 대한제강 등 5곳은 2018년과 올해 모두 제재 철퇴를 맞았다.
현재 철강사들은 경쟁당국을 상대로 소송전에 돌입한 상황이다. 2018년 철근 담합 건은 현대제철과 동국제강 등이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철강사가 패소했고, 최근 대법원에 상고한 상황이다. 올해 초 고철 구매 담합 제재에 대해선 현대제철 등이 소송을 제기했다. 철근값 담합 소송이 끝나기도 전에 고철 담합에 대한 처분에도 철강업계가 법정 다툼에 나선 것이다.
3000억짜리 쟁점 "시장 교란 vs 정보 공유"
우선 공정위는 지난 1월 현대제철 등 7개 철강사에 대해 과징금을 부과했다. 과징금은 △현대제철 910억원 △동국제강 499억원 △한국철강 496억원 △와이케이스틸 429억원 △대한제강 347억원 △한국제강 313억원 △한국특수형강 6억원 등 모두 합치면 3000억원이 넘었다.
공정위 조사 결과를 보면 이 업체들은 2010년부터 8년 동안 고철 구매 기준가격의 변동폭과 변동 시기를 공동으로 결정해 담합을 시도했다. 공장 소재지에 따라 구매팀장들이 총 155회 모임을 갖고 정보를 교환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쟁당국은 국내 고철 시장은 공급보다 수요가 많은 '만성적인 초과 수요' 시장이어서 철강사 간 구매 경쟁이 치열하다고 판단했다. 특정 철강사가 단기에 대량으로 고철을 구입하게 되면 가격이 오르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에 철강사들은 자신들이 구매하는 고철 가격 인상을 막고자 사전에 정보를 교환했다는 게 공정위 조사 결과다.
공정위가 파악한 업체별 담합 이유는 달랐다. 국내 고철 구매 비중의 절반을 차지하는 현대제철과 동국제강은 가격 경쟁을 지양하는 '고철 기준가격 안정화'를 우선순위로 두었다. 소형 철강사의 우선순위는 이보다도 '고철 재고 확보'에 있었다.
조사 과정에서 담합 정황이 담긴 업무 수첩도 발견됐다. 한 현대제철 직원의 2015년 업무 수첩엔 '시장을 흔들어 주어야 한다(와이케이스틸)' '26일 인하를 하자(한국특수형강)' 'A급 추가 인하 검토 계획(한국철강)' 등 합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회사 구매팀장들은 모임 예약 때 '오자룡', '마동탁' 등 가명을 사용했고 법인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갹출했다. 모임 결과를 문서로 작성하는 것도 금지했다.
공정위 제재를 두고 철강 업계에선 "소수의 철강사가 모여 합의를 한다고 국내 철근과 고철 시장의 가격이 쉽게 왜곡되진 않는 구조"라며 하소연하고 있다. 또 정부에 따라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점도 불만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철강산업 장려를 목적으로 업계 정보 공유 등을 용인한 적도 있다"며 "시대가 바뀌면서 관행이 불법으로 비친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제재철퇴→법정다툼' 3년전 판박이
철강사 담합에 대한 경쟁당국에 제재, 그리고 이어진 법정 시비는 3년 전과 판박이다. 2018년 공정위는 철근 판매 가격을 담합한 현대제철, 동국제강, 한국철강, 대한제강, 와이케이스틸, 환영철강 등 6곳에 1194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바 있다. △현대제철 417억6500만원 △동국제강 302억원 △한국철강 175억원 △와이케이스틸 113억원 △환영철강 113억원 △대한제강 73억원 등이다.
당시 공정위는 이들이 2015년 5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총 12차례 합의를 통해 철근 판매 가격을 담합했다고 봤다. 중국산 수입량 증가, 원재료인 고철의 가격 하락 등으로 철근 시세가 회복되지 않자 담합을 시도했다는 게 조사 결과다. 6개 철강사는 영업 팀장급 회의체를 조직하고 20개월간 카페와 식당 등에서 30여차례 모임을 가지며 철근의 할인폭을 축소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 경쟁당국 판단이다.
공정위는 철강사 담합으로 할인 폭이 축소되는 등 합의 내용이 실행됐으며 이후 실거래가 형성에도 영향을 줬다고 보고 있다. 일례로 2015년 5월 철강사들이 기준가 대비 할인 폭을 8만원으로 제한하자 유통 가격이 52만원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가격 지지효과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합의 효과가 떨어지면 재합의해 담합 효과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했다고 공정위는 파악했다.
공정위의 이 같은 조사결과는 현대제철과 동국제강이 행정소송에서 패소함에 따라 법정에서 '사실'로 인정됐다. 이번 상고와 함께 지난 1월 고철 가격 담합 제재에 대한 행정소송도 맞물려 진행되고 있다. 업계는 공정위의 처분이 관행과 현실을 무시한 과도한 행정력 집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법원의 판단은 '관행'으로 포장한 불법 담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