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자국 반도체 공급망 문제 해결을 위해 삼성전자와 같은 반도체 기업에 민감한 내부 정보를 요구하는 등 압박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20조원 규모의 미국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 대상지 결정을 앞둔 상황이다.
지난달 가석방 출소 이후 대외 활동을 자제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어떤 행보와 결단을 보일지 재계의 관심이 쏠린다.
"사업정보 내놔라"
최근 미국 정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 TSMC, 미국 인텔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상대로 45일간 설문 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각 기업들의 반도체 제품 재고, 주문 및 판매 정보 등을 11월 초까지 제출하라는 내용이다. 지난 23일(현지시간) 백악관이 글로벌 반도체·완성차 기업 관계자를 불러 제3차 반도체 공급망 문제를 다룬 회의를 가진 뒤 조사가 추진되는 것이다.
미국 백악관과 지나 레이몬도 미 상무장관은 당시 공식 브리핑에서 "반도체 공급망의 병목현상이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이해하고 계량화하기 위한 차원"이라며 답변에 대해서도 "자발적(voluntarily)"이라고 밝혔다. 삼성은 대응 방안을 놓고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관련 요구를 받았는지 여부도, 대응한다 안 한다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미국이 요구한 것은 대외적으로 기밀에 해당하는 사업의 구체적 상황과 영업 전략을 공개하는 수준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 기업들과 어떻게 거래 중인지 파악하려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하지만 중국도 외국 민간 기업을 상대로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다.
미국 정부가 민간 기업을 상대로 민감한 정보를 제출하라고 한 것은 상당히 무리한 요구라는 평가다. 그런 까닭에 기업들의 자국 투자를 압박하려는 의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삼성전자만 해도 약 20조원 규모의 미국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 증설을 계획한 상황이다. 삼성은 기존 파운드리 공장이 있는 텍사스주 오스틴을 비롯해 다양한 지역을 놓고 세제 혜택 등 유리한 조건을 검토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민감한 기업 내부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출하라고 했으나, 기업들이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알 수 없다.
이재용은 움직일까
이런 배경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조만간 미국 출장에 나서 최종결단을 내릴 것이란 관측도 일각에서 나온다. 반도체 공장 증설뿐만 아니라, 삼성SDI 배터리 공장 건설 및 현지 완성차와의 합작,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백신 수급 등 핵심 현안은 삼성의 최종 의사결정권자가 현지에서 핵심 관계자들을 만나 직접 처리해야 할 사안이란 점에서다.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의 해외 출장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달 가석방 형태로 출소한 이 부회장을 둘러싼 외부 시선이 곱지 않아서다. 이 탓에 지난 추석께 출장도 계획단계에서 접힌 것으로 알려진다. 최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이 부회장을 법률상 취업제한 규정을 위반했다는 내용으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또 가석방 상태인 경우 해외출장은 법무부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 부회장은 이를 허가받아도, 받지 않아도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허가받을 경우 이 부회장의 행보를 곱게 보지 않는 시선이 더욱 거세지고, 허가가 안 될 경우 그의 추가 행보를 막는 일종의 선이 확연하게 그어진다는 얘기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지난 추석 연휴에도 해외출장 등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은 것처럼, 당분간은 조용히 지낼 것으로 보인다"며 "백신 수급 문제를 홀로 해결하려고 나서는 모습도 정치권 등 외부에선 어떻게 볼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