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4일 시작한 미국 출장 이후 현지 재계뿐만 아니라 정계 고위 인사까지 잇따라 만나는 '광폭 행보'를 연일 보이고 있다.
출장 직후 모더나, 버라이즌 경영진을 만난 뒤 연방 의회 의원들과 회동한 데 이어 워싱턴 D.C.에서 백악관 고위급 인사들을 만나 반도체 공급망 문제를 논의하는 등 이른바 '민간 외교관' 역할을 했다. 직후 주말에도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등 사업 파트너인 세계적 정보통신기술(ICT) 기업 경영진과도 만났다.
삼성전자가 미국에 20조원(약 170억달러) 규모로 증설할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의 부지 발표도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관측이다.
이재용 따로 부른 백악관…"반도체 공급망 논의"
20일 삼성전자에 따르면 이재용 부회장은 미국 백악관의 개별 초청에 따라 19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을 방문해 핵심 관계자들을 만났다. 이 부회장과 백악관 고위 관계자들은 글로벌 이슈로 부상한 반도체 공급망 문제 해결 방안과 관련, '삼성의 역할'에 대해 폭넓게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관계자는 "백악관이 외국 기업 대표를 개별적으로 초청해 핵심 참모들과의 면담 일정을 마련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며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의 위상을 실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삼성전자를 비롯한 79개 글로벌 기업을 대상으로 '반도체 공급망 자료'를 요청했으며, 삼성도 자료를 제출한 바 있다.
이 부회장은 이와 별도로 미국 연방정부 고위 관계자 등과도 만나 반도체 기업 대상 인센티브 등 현안에 대해서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자리에서는 5G(5세대 이동통신), 바이오 등 미래 성장사업을 중심으로 양국 정부와 민간의 '전략적 협력' 필요성에 대해서도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에 앞서 지난 18일에는 연방의회 핵심 의원들을 잇달아 만났다. 이 부회장이 만난 의원들은 반도체 인센티브 법안을 담당하는 핵심 인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반도체 인센티브 관련 법안의 통과 등에 대한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따라 조만간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장 후보지가 발표가 유력한 것으로 관측된다.
앞서 삼성전자는 지난 5월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일정 중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행사에서 미국에 170억달러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공장 부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관련기사: 거세지는 미국의 삼성 압박…이재용의 선택은(9월22일)
MS·아마존 만났다…미래 먹거리 '협력'
정계 인사들과의 회동 이후 이재용 부회장은 20일에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글로벌 ICT 기업을 찾았다. 이 부회장이 지난 16~17일 코로나19 백신을 만드는 바이오 기업 모더나, 세계 최대 이동통신 기업 버라이즌 경영진을 잇달아 만난 이후 진행된 '방미 비즈니스 미팅 2라운드'라는 분석이다.
우선 이 부회장은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반도체와 모바일은 물론 가상현실(VR) 및 증강현실(AR), 메타버스 등 차세대 기술에 대한 협력과 소프트웨어 생태계 확장에 대한 의견을 나눈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회장은 나델라 CEO는 전화·화상 회의 등을 통해 수시로 접촉하는 사이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2016년 7월 미국 아이다호주에서 열린 선밸리컨퍼런스에 나란히 참석한 바 있고, 2018년 나델라 CEO가 방한했을 때 이 부회장과 만난 바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이어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e커머스) 플랫폼 아마존을 방문한 이재용 부회장은 인공지능(AI)과 클라우드 컴퓨팅 등 차세대 유망산업 전반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아마존은 삼성전자가 주도하는 차세대 화질 기술인 'HDR10+' 진영에 참가하고 있으며, 삼성 스마트TV에 AI '알렉사'를 제공하는 등 기술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양사 경영진은 이번 미팅을 통해 혁신 분야에서의 협력 확대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용의 '광폭행보' 의미는
이재용 부회장의 이번 행보들은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라는 초유의 상황 속에서 삼성의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 동시에, 국가 경제에 기여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 부회장의 미국 방문은 2016년 7월 선밸리컨퍼런스 참석 이후 5년 4개월 만이지만, 이번에 현지 정·재계에서 상당한 위상이 있음을 보여준 셈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부회장은 이어지는 미국 출장에서 글로벌 비즈니스 리더들과의 회동을 더 이어갈 전망이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삼성 총수 자격으로 현지 기업인뿐만 아니라 정계 관계자들을 만나고 있다"며 "글로벌 공급망을 안정화하기 위한 노력이자 한미 양국의 우호 증진에 기여하는 역할까지 했다는 점에서 한층 높아진 위상을 확인하게 했다"고 평했다.
이 부회장이 이런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 부회장은 2013년 한국인 처음으로 미국 상무부 자문기구인 '비즈니스 카운슬' 정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비즈니스 카운슬은 1933년 당시 미국 상무장관이었던 다니엘 로퍼가 창설한 것으로 다양한 기업 CEO들과 현안을 논의하고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회의체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이 부회장을 지난 8월 가석방하는 이유로 제시한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국가 경제 상황과 글로벌 경제 환경에 대한 고려'에 부응하기 위해 이 부회장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준 게 이번 방미 일정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