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영수증 더미를 발견하면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이걸 왜 여태 안 버리고 뒀나'싶은 물건을 뒤늦게 정리한 기억이 있으실텐요. 치운 티는 크게 안 나지만 그래도 정리정돈의 의미가 있기 마련이죠. 과거에 구매했던 이력으로 잠시 추억에 잠길 수도 있고요. 기업 장부에도 비슷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LG전자가 최근 결정한 자사주 소각이 그런데요.
전체 주식 수에 비하면 존재감이 미미하지만 LG전자가 20세기 말부터 품어온 주식이란 점에서 우선 눈길을 끕니다. 게다가 최근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주주환원 일환이란 점에서도 LG전자의 진심을 엿볼 수 있죠.
LG정보통신의 마지막 흔적
LG전자는 지난 12일 이사회를 열고 과거 합병·분할 과정에서 취득해 장부상에 남아있던 자사주 전량을 소각해 자본금을 줄이기로 결정했습니다. 비자발적 자사주를 없애 감자를 한 건데요.
LG전자가 보유한 자기주식에 대해서만 무상 소각을 진행하는 만큼 일반 주주의 보유 주식 수에는 변동이 없습니다. 구주권 제출이나 신주권 교부 등 별도의 절차도 필요하지 않다는 게 LG전자 측의 설명입니다.
이번에 사라지는 주식은 보통주 1749주와 우선주 4693주로, 모두 합쳐 6442주입니다. 사실 전체 발행 주식 수와 비교하면 아주 적은 양이고 시가로 따져도 그리 큰 금액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주식들의 계보를 쫓아가면 무려 26년 전인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LG전자가 합병한 (구)LG정보통신은 과거 '싸이언(CYON)' 브랜드로 휴대폰 시장을 호령했던 곳입니다. 합병 이후 싸이언은 LG전자의 대표 휴대폰 브랜드로 자리 잡으며 피처폰 시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는데요. 2000년 합병과 2002년 지주회사 체제 전환 과정에서 발생한 물량들이 지금까지 장부에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이사를 여러 번 다니면서도 미처 버리지 못하고 창고 구석에 넣어두었던 낡은 짐과 비슷한 처지였던 셈입니다.
LG전자가 이 작은 물량을 찾아내 없애기로 한 것은 장부를 깨끗하게 정리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됩니다. 한편으로는 그간 무심했던 지배구조의 군더더기를 이제야 털어낸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번 소각으로 LG전자의 자본금은 9041억6903만원에서 9041억3682만원으로 소폭 줄어듭니다.
적극적 환원책 이면에는…
LG전자가 이 시점에 싸이언 시절 때 품은 주식 정리에 나선 것은 최근 지속해온 주주환원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데요. LG전자는 지난해 7월 76만1427주의 자사주를 태웠고 지난달에는 1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추가로 매입해 향후 소각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특히 1000억원은 LG전자가 지난해 말 기업가체 제고계획 이행현황 공시를 통해 2년간 2000억원의 주주환원을 하겠다고 밝힌 정책의 일부로, 임직원 상여 지급 목적이 아닌 주주가치 제고를 목적으로 자사주를 사들인 건 처음이었습니다. 이번 잔량 소각 역시 규모가 크진 않지만 꽤 긴 시간동안 보유했던 물량까지 태웠다는 점에서 주주환원에 대한 진심을 표명한 것이죠.
하지만 이처럼 적극적인 행보는 2025년에 거둔 부진한 성적표와 오버랩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커진 재무부담으로 차가워진 주주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한 절박함일 수도 있는데요.
지난해 LG전자의 매출은 89조2008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지만 영업이익은 2조4783억원에 그치며 전년 대비 27.5%나 급감했습니다. 덩치는 커졌는데 내실은 오히려 나빠진 것입니다.
특히 지난해 4분기에는 109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9년 만에 분기 적자로 돌아서는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원자재 가격 상승과 물류비 부담이 커진 데다 가전 시장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진 탓입니다. 여기에 인력 구조를 효율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천억원 규모의 희망퇴직 비용이 한꺼번에 반영된 점도 뼈아팠습니다.
사실 수익성이 둔화된 상황에서 자사주를 매입하고 소각하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 재무적인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결정은 실적 부진으로 돌아선 투자자들에게 주주 환원 약속만큼은 이행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인데요.
과거 묵혀있던 주식을 태우면서까지 주주환원에 대한 진심을 내비친 데는 성공했지만 본업에서의 실적 회복 과제가 더 중요해 보입니다. 26년 묵은 유물을 정리한 LG전자가 2026년 한 해 동안 수익성 반등을 통해 실질적인 기업 가치 제고를 이뤄낼 수 있을지가 주목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