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시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주식시장이다. 애플과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테슬라, 페이스북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글로벌 기업들이 서로 자기 가치를 뽐내는 꿈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 거대한 시장에 최근 'K-머니' 바람이 거세다. 서학개미들의 투자 러시에 이어 국내 최대 이커머스 기업 쿠팡을 필두로 국내 비상장 기업들의 본격적 진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열풍을 넘어 대세가 된 미국 증시. 어떤 점이 한국 투자자와 기업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조명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미국 시장 진출은 비단 개인투자자뿐만 아니라 비상장 기업에도 중요한 화두다. 얼마 전 국내 이머커스 최강자 쿠팡이 뉴욕 증시에 상장하면서 100조원에 달하는 몸값을 인정받았다는 소식은 이런 분위기에 불을 댕겼다.
증시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들의 미국 증시 입성 시도가 앞으로 더 활기를 띨 것으로 예측한다. 해외 기업공개(IPO)의 핵심 목적이 저렴한 조달 비용으로 더 많은 자금을 수혈하는 데 있는 만큼 쿠팡의 성공적인 데뷔 소식은 미국 증시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 성공 스토리 쓴 쿠팡…이미 예고된 '잭팟'
적절한 기업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뉴욕 증시 상장까지 10년이란 세월을 인내한 쿠팡의 성공은 일찌감치 예견됐다. 해외 주요 외신은 쿠팡의 증시 입성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올해 초부터 이미 수십조원에 이르는 몸값을 매긴 바 있다.
쿠팡의 기업 가치를 비교적 보수적으로 책정한 블룸버그통신은 300억달러(한화 약 33조7400억원)를 제시하면서, 국내 증시에 상장했을 경우에는 그 가치가 100억달러(약 11조2500억원)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파이낸셜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쿠팡에 대해 500억달러 이상의 시장 가치가 기대된다는 의견을 내놨는데, 이를 환산하면 우리 돈 56조2400억원에 달한다.
실제 뚜껑을 열어보니 그 가치는 기대 이상이었다.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 첫날인 지난 11일(현지시간) 공모가 대비 40.71% 상승한 49.25달러(약 5만5400원)에 거래를 마치며 시가총액 891억달러(약 100조2460억원)를 달성했다.
쿠팡은 이번 상장을 통해 5조원 이상의 자금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미국 CNBC 방송에 출연한 쿠팡 창업자 김범석 의장은 조달 자금으로 적극적인 투자활동에 나설 것을 예고했다. 용처를 묻는 질문에 김 의장은 "새벽배송과 같은 혁신 사업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한국의 지역 경제에 지속적으로 투자할 것"이라며 "기술 분야와 사회 전반적인 통합을 위해서도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뉴욕 증시에 화려하게 데뷔한 쿠팡이 그를 통해 얻은 실탄으로 공격적인 투자를 예고하자 국내 유통업계의 발걸음도 갑자기 바빠졌다. 신세계그룹과 네이버가 2500억원 규모의 지분을 주고받으며 공식적인 협업에 나선 게 대표적인 예다.
◇ 기업들의 시선은 '젖과 꿀'이 흐르는 뉴욕으로
쿠팡이 미국 시장에서 높은 잠재력을 인정받으며 '잭팟'을 터뜨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비상장 기업들도 뉴욕 증시 진출에 자신감을 얻는 모양새다.
후발주자로 여러 업체들이 거론되는 가운데 바통을 이어받을 가장 유력한 후보는 신선식품 배송 전문 플랫폼인 '마켓컬리'다. 지난 12일 사내 공지를 통해 연내 상장을 공식화한 마켓컬리는 뉴욕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 증시를 포함해 다양한 채널을 통한 상장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WSJ는 마켓컬리의 몸값을 8억8000만 달러, 우리 돈 1조원 수준으로 예측했다.
국내 11번째 유니콘 기업으로 등극한 에이프로젠도 주력 바이오시밀러인 레미케이드, 허셉틴, 휴미라, 리툭산 등을 앞세워 나스닥을 비롯한 해외 증시 상장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문 계약을 맺은 일본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향후 10년간 매출과 영업이익 전망 등 전체적인 성장성을 고려했을 때 조 단위 밸류에이션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핀테크 전문 기업 '두나무'와 삼성출판사가 2대 주주로 있는 콘텐츠 기업 '스마트스터디' 등도 잠재적 후보군으로 분류된다. 스마트스터디는 지난해 11월 나스닥 상장설이 한창 돌았을 당시 "나스닥 상장 진행과 특정 시장에서의 상장 계획이 없다"며 관련 루머를 전면 부인했지만 시장에서는 여전히 기대감이 식지 않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가늠자를 점차 미국으로 돌리고 있는 데는 성장성을 우선시하는 투자 환경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슬라는 지난 2010년 나스닥 상장 후 10년이 지나서야 첫 연간 흑자를 기록할 만큼 만년 적자 기업이었음에도 전기차·에너지 플랫폼 기업으로서의 미래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700조원이 넘는 시총을 자랑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쿠팡 또한 마찬가지다. 창립 이후 단 한 번도 흑자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쿠팡이 미국 증권위원회(SEC)에 제출한 증권신고서를 보면 지난해 집계된 영업손실만도 5억2800만달러(약 5850억원)에 달했지만 미국 투자자들은 회사의 성장성에 더 높은 점수를 줬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국내 시장은 적자기업이 상생하기에 사실상 불가능한 환경"이라며 "이와 달리 미국은 회사의 잠재력이나 성장성 등과 같은 요소들을 중심으로 기업을 평가하는 투자문화가 정착해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투자 관점은 공모 절차를 밟고 있는 기업들에게 우호적으로 여겨진다. 저렴한 비용으로 미래 성장 동력으로 활용할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국내 기업이 사업 무대를 확장하는 데 있어서도 미국 시장이 좀 더 유리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빈기범 명지대 경제학부 교수는 "예전부터 해외 상장 동기에 대한 연구가 학계에서 많이 진행됐다"며 "전반적으로 기업들의 인지도 강화와 투명성 추구가 동기로 지목되고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