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중앙은행의 긴축 기조에다 경기 침체로 인한 하락장세가 장기화하면서 주식시장의 '큰손' 국민연금이 쩔쩔매고 있다. 운용 수익률은 매달 마이너스(-)다. 지난 6월 급락장 당시에는 국내 주식 보유액이 연초 대비 20조원가량 증발하기도 했다.
부진한 운용 실적에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국민연금은 최근 화학주를 대거 팔아치운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침체와 공급량 증대가 하반기 실적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반등 후 조정을 겪는 방산주도 매도했다. 대신 식품과 의류 등 가격 변동성이 낮은 전통적 방어주를 담은 점이 눈에 띈다.
화학·방산주 처분 나선 국민연금
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국민연금공단은 근래 화학 업종 비중을 대거 축소했다.
지난 9월30일 OCI 지분 비중을 11.57%에서 10.07%로 1.50%포인트 줄인 데 이어 10월24일에는 롯데정밀화학 지분 비중을 12.42%에서 10.14%로 2.28%포인트 축소했다. 이밖에 한솔케미칼(1.1%포인트), 효성화학(0.85%포인트) 등의 비중도 낮췄다.
시장이 바라보는 화학업종의 3분기 실적 눈높이는 이미 낮아진 상황이다. 증권가에서는 글로벌 경기 침체 타격은 물론, 이미 확대된 공급량이 업황에 부담을 주고 있다고 분석한다.
최고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중국이 화학제품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대규모 증설투자를 주도한 탓에 글로벌 경기 침체가 아니더라도 수요가 따라기 어려운 수준의 공급 증가가 이어지고 있다"면서 "화학업계가 가동률을 낮추며 마진 방어를 시작하면서 내년부터는 증설 규모가 4년만에 둔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민연금은 아울러 방산주도 장바구니에서 덜어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지분 보유 비중을 9월30일, 10월24일 두 차례에 걸쳐 2.60%포인트 줄였다. LIG넥스원(-0.10%포인트), 한국항공우주(-0.01%포인트) 등의 비중도 축소했다.
방산주는 지난 여름 증시를 주도한 '태조이방원'(태양열·조선·이차전지·방산·원자력) 테마 중 하나로 단기 급등했던 업종이다. 그러나 단기간 주가가 대폭 오른만큼 조정을 겪을 우려가 높아 처분에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방산업종 대장주는 8월말~9월초에 고점을 찍은 이후 고전하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9월7일 8만6800원까지 치솟은 뒤 10월 중반 5만원대로 추락했다. 현재는 소폭 반등해 6만원대 중반에 거래되고 있다. LIG넥스원도 9월7일 11만4000원으로 고점을 기록했지만 이후 8만원대까지 반락했다가 최근 낙폭을 일부 회복했다. 한국항공우주 역시 마찬가지로 9월7일 6만3900원의 고점을 형성했으나, 현재 4만원대로 내려앉은 상황이다.
전통 방어주로 수익률 하락 방어
국민연금은 반면 식품, 의류와 같이 전통적 방어주의 보유 지분은 늘리는 모습이다. 이들은 가격 변동성이 비교적 적은 업종으로 꼽힌다.
국민연금은 화승엔터프라이즈 지분을 10.01%에서 10.41%로, 영원무역 지분을 10.03%에서 10.20%로 각각 0.40%포인트, 0.17%포인트씩 확대했다.
이들은 해외 브랜드 의류나 운동화를 위탁생산(OEM) 기업들로, 환율 수혜가 기대된다. 달러 강세로 인한 원화 환산 매출과 이익이 높아질 것으로 관측되기 때문이다.
신한투자증권에 따르면 3분기 달러/원 환율은 전년동기대비 16.3% 상승했다. 현 추세대로라면 4분기 평균 환율은 최소 1430원을 넘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박현진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전년 동기 대비 20% 이상 차이가 벌어지며 OEM업체들의 환율 효과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면서 "다만 환율효과가 지속해서 커짐에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은 전방 소비 수요가 불확실하다는 점"이라고 언급했다.
국민연금은 식품주도 추가로 담았다. 지난달 20일 오리온 지분을 10.01% 취득했다고 공시했다. CJ제일제당 지분은 12.44%에서 12.63%로 0.19%포인트 늘렸으며 대상 지분은 1.89%에서 12.10%로 0.21%포인트 확대했다. 농심과 롯데칠성음료 지분도 각각 0.76%포인트, 0.52%포인트씩 늘렸다.
국민연금은 상반기부터 식품업종에 꾸준히 관심을 보이고 있다. 2분기 국민연금 대량보유 종목을 살펴보면 CJ제일제당, CJ프레시웨이, 삼양식품, 롯데칠성음료, 오리온 등이 지분 확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식품주는 최근 원자재값이 안정화되고 있는 가운데 판가 인상으로 수익률을 방어할 수 있다. 이베스트투자증권에 따르면 최근 농심과 팔도는 1년1개월, 오뚜기는 1년2개월 만에 라면 가격 재인상을 단행했다. 라면 4사 가운데 삼양식품은 아직 라면 가격을 인상하진 않았지만 10월부터 짱구, 사또밥, 뽀빠이 등 과자 가격을 15.3% 올렸다. 오리온도 9월 16개 제품 가격을 평균 15.8% 인상했다.
오지우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제분, 제당, 면류 등 제조원가 대비 원재료 익스포저가 높은 기업들은 판가 인상 효과와 투입원가 하락이 동반된다"며 "이익 스프레드 확대가 기대되는 CJ제일제당, 농심, 대상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포트폴리오 조정에 나선 국민연금이 연말 북클로징(장부마감)을 앞두고 투자 손실을 얼마나 회복할 수 있을지에 시장의 이목이 쏠린다. 국민연금은 지난달 28일 8월 월간 수익률이 -4.74%라고 밝혔다. 포트폴리오 중 국내 주식 수익률은 -14.76%로 집계됐다.
이에 따라 국내 주식 보유액도 쪼그라들었다. 월간 말 주식 잔액을 살펴보면 1월 150조9800억원에서 6월 132조310억원으로 20조원가량 줄었다. 8월 기준으로는 139조5680억원을 기록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