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계열 삼성전기에서 디지털모듈과 전자식 가격표시기(ESL) 분야를 떼어내 설립한 코스피 상장사 솔루엠이 핵심인 ESL 사업 분할을 검토 중이다. 이미 솔루엠 내부에는 ESL사업 분할을 위한 태스크포스(TF)가 꾸려졌다.
솔루엠이 ESL사업을 분할하면 모듈사업을 하는 지주회사 솔루엠과 ESL사업을 하는 자회사로 쪼개진다. 회사가 물적분할, 인적분할 어느 쪽을 선택하든 지주회사로 남을 현재의 솔루엠은 ESL이란 핵심사업과 거리를 두게 된다.
솔루엠의 이러한 선택은 최근 거센 시장 비판에 직면한 뒤 인적분할 계획을 철회한 파마리서치와 흡사하다. 파마리서치는 작년부터 최근까지 상환전환우선주(RCPS) 발행, 인적분할 계획을 연이어 발표한 이후 승계 사전작업이란 지적을 받았는데 솔루엠도 유사한 과정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ESL분할 준비...2세 주도 내부 TF 구성
솔루엠은 지난 24일 한국거래소의 'ESL 사업 분사 진행' 관련 조회공시 요구에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하지만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솔루엠은 회사의 핵심사업인 ESL사업의 분할을 검토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IB업계 한 관계자는 "솔루엠 내부에 이미 분사를 도울 TF가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해당 TF는 7월 초에 꾸려져 전성호 대표의 장남 전동욱 솔루엠 상무(경영전략팀장)가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SL사업은 솔루엠의 핵심사업 중 하나다. ESL은 대형마트에서 볼 수 있는 전자형태의 라벨이다. 마트에 가면 상품의 이름과 제품 가격을 표시해둔 팻말을 볼 수 있는데 이를 사람이 일일이 고치는 수기 형태가 아닌 전자 형태로 자동 수정할 수 있도록 구현한 것이 ESL이다. 솔루엠은 현재 TV용 파워모듈·모바일용 어댑터 등 기존사업과 함께 ESL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솔루엠의 ESL은 국내 롯데마트·GS25·이마트24·올리브영 및 미국·일본·독일 등 해외 마트에서도 진출했다.
솔루엠은 ESL사업의 후발주자임에도 빠르게 성장한 결과 글로벌 매출 2위를 달성 중이다. 경쟁사 대비 ESL의 배터리 수명이 길고 방수 등 기능이 더해지면서 솔루엠의 ESL을 선호하는 고객사가 늘어난 덕분이다. 시장도 ESL을 솔루엠의 핵심 사업으로 보고 ESL사업의 확장 여부에 솔루엠의 성장가능성이 달려있다고 보고 있다. 영업이익률 면에서도 TV용 파워모듈 등 다른 사업부의 두 배에 이르는 알짜 사업이다.
다만 회사의 성장이 달려있는 ESL사업을 실제로 분할한다면 기존 솔루엠 주주들에겐 허탈한 지점일 수밖에 없다. 인적분할을 통해 지주회사 솔루엠과 쪼개지는 ESL사업회사의 주식을 나눠 갖더라도 지주회사로 남을 현재의 솔루엠은 핵심사업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껍데기 지주회사가 될 가능성이 있고 분할비율 적정성 문제가 뒤따른다. ESL사업을 물적분할로 쪼개 솔루엠의 완전자회사로 남기더라도 주주들은 향후 중복상장 가능성으로 인한 리스크를 안고 갈 수밖에 없다.RCPS 투자자, 분할 계획 알고 돈 댔나
솔루엠이 핵심 사업을 분할하려는 계획은 지난 6월 발행한 RCPS에서도 엿볼 수 있다. 솔루엠은 RCPS 발행도 ESL사업 분할을 염두에 두고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6일 1120억원 규모의 RCPS를 발행한다고 발표한 솔루엠은 애초 금융감독원에 제출하는 RCPS 발행 관련 주요사항보고서에 ESL사업 분할 계획을 넣으려고 했지만 법률자문 결과 제외한 것으로 알려졌다. LG에너지솔루션의 물적분할, 최근 파마리서치·하나마이크론의 인적분할 등 기업분할 자체에 대한 시장인식이 좋지 못한 것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솔루엠은 RCPS로 조달하는 자금의 사용처로 △ESL의 해외 판매 네트워크 확대 및 우수인력 확보 △신규 생산법인 설립 △베트남·멕시코 생산법인 설비투자만 제시했다.
하지만 이미 IB업계에선 솔루엠의 분할 검토 소식이 파다한 상황이었다. 솔루엠 RCPS 투자자들도 ESL사업 분할 계획을 인지하고 RCPS에 투자했다는 후문이다.
솔루엠에 정통한 IB업계 관계자는 "RCPS에 투자한 신한투자증권 등 증권사들은 ESL사업 분할을 인지하고 투자한 것으로 안다"며 "분할 후 ESL사업이 주식시장에 재상장하면 상장 차익을 추구할 수 있어 RCPS에 투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솔루엠은 이미 전성호 대표이사의 장남(전동욱 상무), 차남(전세욱 상무)이 회사에서 각각 경영전략팀장, ESL 솔루션비즈 사업부장을 맡고 있다. 이른바 '패밀리 경영'을 하고 있는 회사다.
IB업계에선 이러한 경영구도를 갖춘 회사가 발행하는 RCPS에 돈을 대는 투자자들이 실사(Due diligence) 단계에서 향후 회사 구조변화, 승계 계획을 집중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거액을 투자할리 없다는 게 상식으로 통한다. 상환·전환기간이 길고, 특히 솔루엠의 RCPS는 몇 년 후의 시세차익, 즉 전환권에 무게중심을 둔 만큼 중장기 주가변동을 초래할 중대 변수를 지나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묻지 않고 투자하는 것이 무능이란 시각이다.파마리서치와 똑같은 전철 밟는 솔루엠
솔루엠이 RCPS를 발행하고 ESL사업 분사를 추진하려는 것은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섰던 파마리서치 사례와 여러모로 닮아있다.
라쥬란으로 유명한 파마리서치도 솔루엠 전성호 대표처럼 최대주주(정상수 이사회의장)의 지분율이 절대적으로 높은 상황은 아니다. 아울러 정상수 의장의 자녀로 향하는 승계이슈도 맞물려 있었다. 솔루엠의 전성호 대표 역시 장·차남 승계이슈가 있는 상황이다.
파마리서치는 인적분할을 통해 지배구조를 정비하려 했다. 올해 6월 인적분할 발표 전인 지난해 9월 사모펀드 CVC를 대상으로 2000억원 규모의 RCPS를 발행하면서 우호세력(의결권 공동행사)을 확보했다. 솔루엠 역시 지난 6월 발행한 1120억원 규모 RCPS를 발행하면서 투자자들과 주주계약을 맺어 전성호 대표의 특수관계인(공동보유자)에 포함시켰다.
파마리서치, 솔루엠 두 회사 모두 RCPS로 자금조달과 함께 우호지분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 ▷관련기사: RCPS로 저가매수·우호지분 다 잡은 '솔루엠' 전성호 대표(7월 25일)
RCPS 발행 규모도 유사하다. 파마리서치는 RCPS 전량 보통주 전환 시 기존발행주식의 10.2%에 해당하는 신주를 발행한다. 솔루엠 역시 이번 RCPS 투자자가 향후 전환권을 행사하면 총발행주식수의 14.3% 수준으로 신주를 발행할 의무가 있다.
파마리서치는 지난 6월 회사를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나누는 인적분할을 결정했지만, 불균형한 분할비율과 승계 사전작업 논란 등이 불거지면서 결국 여론의 철퇴를 맞고 분할 결정을 철회했다.
솔루엠 역시 파마리서치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RCPS로 우군을 확보하고 핵심사업인 ESL사업 분할을 검토한다는 것이 파마리서치와 닮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파마리서치가 시장의 뭇매를 맞았던 만큼 솔루엠도 유사한 반발을 살 가능성이 있다. 이미 솔루엠 소액주주연대는 지난 2월 정기주총에서 집중투표제 도입 제안 등 주주권 강화 움직임을 보인 바 있다.
한편 이번 솔루엠 ESL 분할 검토에 대해 지분 8%를 보유하고 있는 2대주주 VIP자산운용은 분할계획을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민국 VIP자산운용 대표는 "주주들의 공감을 얻을 만한 계획을 하고 실행을 했으면 좋겠다"며 "분할계획을 할 만한 시점이 무르익기 전까지는 쓸데없는 노이즈를 만들진 않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
김민국 대표는 "분할 명분을 볼 때 저희가 찬성할 입장은 아니다"라며 "다만 저희는 아직까지 솔루엠에 대해 단순투자 목적이고 지켜보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VIP자산운용은 최근 롯데렌탈 유상증자 철회 관련 주주행동을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곳이다. 파마리서치는 머스트자산운용이 주주행동을 주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