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인공지능)은 신약개발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게임체인저'로 주목받고 있으나 산업현장에서는 그 활용이 아직 제한적이다. AI 모델을 고도화하기 위한 양질의 데이터 확보가 어렵고, 이를 다룰 전문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바이오 데이터, 여전히 제한적
최근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21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제약바이오 업계 활성화를 위한 정책 제안을 발표했다. 총 10개의 정책 과제 중 3개가 AI를 다루고 있다. 차례로 △협력형 AI 신약개발 가속화 사업 구축 △신약개발 빅데이터 플랫폼 개발 △AI 바이오 전문인재 양성 위한 산학협력형 교육과정 신설이다.
주로 바이오업계를 대변하는 한국바이오협회도 21대 대선을 앞두고 정책 제언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서 바이오협회 역시 AI 기반 신약개발을 활성화 하기 위한 방안을 담을 예정이다.
최근 AI는 방대한 생물학 데이터를 단기간에 분석해 신약개발의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는 핵심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산업현장에서는 실질적인 활용에 어려움이 많다. 업계는 그 이유로 바이오 데이터의 낮은 활용성과 연구 인프라 부족을 공통 과제로 꼽는다.
신약개발 분야에서 AI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양질의 바이오 데이터 확보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현재 바이오 데이터는 제약사, 연구기관 등 개별 기관에 분산돼 있으며 정보유출 등의 문제로 인해 공유가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공공기관이 방대한 의료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지만 이를 신약개발 등 연구 목적으로 활용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용 승인 절차가 까다롭고 데이터 형식이 표준화되지 않아서다. AI 모델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의 양과 다양성 부족으로 성능에 한계가 생길 수 있다는 의미다.
AI 신약개발사 관계자는 "한국에서는 임상실험 등에서 생성된 바이오데이터가 아예 공개되지 않거나, 고가의 비용을 지불해야 해 접근성이 많이 떨어진다"며 "반면 일본은 국가가 이 데이터를 관리하며 AI 개발사에 무상에 가까운 수준으로 제공해준다"고 말했다.
업계는 AI 모델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개별 기관이 보유한 바이오 데이터를 안전하게 공유하고 활용할 수 있는 오픈 이노베이션(개방적 협력) 체계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현재 제약바이오 업계는 보건복지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와 'K-멜로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K-멜로디 사업은 개별 기관이 보유한 바이오 데이터를 AI에 학습시킨 후 그 결과물을 공유하는 협력 구조다. 지난해 첫발을 뗐지만 민간 데이터만의 활용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이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공공기관이 방대한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지만 기업이 활용하기까지 여전히 높은 진입 장벽이 존재한다"며 "정부가 바이오 데이터를 활용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생태계 조성에 참여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인프라 투자 시급
AI 신약개발의 발전을 위해 데이터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는 연구 인프라다. AI 신약개발 분야 연구 인프라는 GPU(그래픽처리장치)와 같은 연산(컴퓨팅) 자원과 이를 운용할 전문 개발인력으로 이뤄져 있다.
고성능의 컴퓨팅 자원은 AI 신약개발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연산 자원이 충분하지 않으면 AI 모델의 학습이 지연되거나 성능이 저하될 수 있다.
영국계 바이오기업인 알케맙은 최근 일라이릴리에 신경 퇴행성 질환 치료후보물질을 이전했다. 여기에는 엔비디아가 2021년 영국에 바이오 연구를 위해 기증한 슈퍼컴퓨터 '캠브릿지-1'의 역할이 컸다. 알케맙은 640개의 고성능 GPU로 구성된 캠브릿지-1을 활용해 일라이릴리에 이전한 약물을 발굴했다.
이와 달리 현재 국내에서는 많은 연구기관들이 슈퍼컴퓨터는커녕 GPU를 확보하지 못해 연구에 차질을 빚고 있는 상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달 시행한 조사에서 대기업을 제외한 산학연 405개 기관 중 45.9%는 6개월 이내 GPU 확보가 시급하다고 응답했다.
컴퓨팅 자원이 자동차의 엔진이라면 개발 인력은 그 엔진을 움직이는 운전자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업계는 현재 전문 교육 시스템 부재 등으로 AI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산하 AI신약개발지원센터는 2022년 국내 제약바이오 및 AI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시행했다. 여기서 기업들은 신약개발 과정에서 AI 도입과 운용이 어려운 이유를 묻는 질문에 '숙련된 인력 부족 및 고용(88.2%)'를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했다.
대선을 약 보름 앞두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AI와 바이오 두 분야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바이오 분야에서 AI 활용을 활성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공약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AI 데이터 클러스터 조성(이재명), 규제혁신처 신설(김문수) 공약 등이 업계의 어려움을 해소할 방안으로 기대되고 있다.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AI 신약개발을 비롯한 전 바이오 산업 투자가 위축되면서 매출이 없는 바이오기업들은 연구인력, 파이프라인 등 R&D(연구개발)를 축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기업에게 자금이 없으면 양질의 데이터가 있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산업 생태계가 복구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