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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그리고 고춧가루 탄 소주

  • 2015.01.02(금) 08:04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마시면 감기가 낫는다”

 

주당들이 술 권할 때 쓰는 말이지만 진짜 감기에 효과가 있을까?

혹시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의사의 대답이다. 소주나 고춧가루 모두 발열 작용을 하니 땀 흘려 나을 감기라면 효과를 볼 수도 있겠지만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을 확률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치료효과보다는 부작용이 훨씬 클 것이라는 경고다.
 

그렇다면 감기에는 고춧가루 탄 소주가 특효라는 말이 왜 생겨났을까? 단지 무지의 소치였을까, 아니면 감기 걸린 주당이 그래도 술이 마시고 싶어 만들어낸 핑계였을까?

 

자세한 사연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우리 조상님들은 먼 옛날부터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서 마셨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시기는 임진왜란 무렵이다. 최초의 기록이 광해군 때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실려 있다.
 

“남만초(고추)에는 강렬한 독이 있는데 일본에서 처음 전해졌기에 왜겨자라고도 부른다. 그 맹렬함을 이용해 요즘은 주막에서 종종 고추를 심어 소주에 섞어 파는데 마시고 죽는 사람이 많다”

 

최초로 전해진 고추가 양념이나 고추장으로 쓰이지 않고 소주에 타 마시는 용도였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그렇다고 고추 탄 소주 마시고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기록도 황당하다.
 

지나친 과장이 아닐까 싶지만 조선시대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요즘 소주는 희석식으로 16도짜리도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순수 증류주였기에 알코올 도수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조선 소주가 얼마나 독했는지 숙종 때 청나라에 사신을 다녀 온 이의현의 「경자연행잡지」에 북경 사람들은 조선의 소주가 독하다며 잘 마시지도 않고 마셔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독하기로 유명한 배갈을 마시는 청나라 사람들이 조선 소주가 독하다며 싫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맹렬하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매운 고추를 섞었으니 고추 탄 소주 마시고 죽은 사람이 적지 않다는 지봉유설의 기록이 과장이 아닐 수 있다. 그러니 감기 걸린 사람이 마시고 살아남았다면 그까짓 감기 떨어지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소주에 고춧가루 타 마신 이유를 또 다른 각도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새해 첫날이 되면 온 가족이 모여 도소주(屠蘇酒)라는 술을 마셨다.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술이라는 뜻으로 병에 걸리지 않고 한 해를 건강하게 보내게 해 달라는 의미였다.
 

도소주로는 주로 후추나 산초로 담근 초주(椒酒)라는 약술을 마셨다. 삼국지에서 관우를 수술한 명의 화타가 빚었다는 이 술은 한 잔만 마셔도 추위를 물리치고 병을 치료하며 몸이 튼튼해진다는 술이다. 

 

초주는 아무나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재료가 후추 혹은 산초였기 때문인데 지금이야 특별할 것 없는 양념이지만 옛날 서양에서는 같은 무게의 금과 가격이 같았을 정도로 비싼 향신료였다. 동양도 마찬가지여서 명절이 되면 임금이 특별히 대신들에게 한 되씩 하사했을 정도로 귀했다.

 

그러니 서민들한테 후추나 산초로 담근 초주는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고 대신 고춧가루 탄 소주인 고초주(苦椒酒)를 마시며 감기라도 떨어지기를 기원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2015년 새해, 모두가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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