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세상에서 부자 되기 싫다는 사람은 드물다. 종교 문제를 떠나 다음 세상에서 `천당`이나 `극락` 가기를 염원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부자가 천당에 가는 길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다. 이 말이 `이율배반적이다`라거나 `헷갈리게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자라도 농경시대 같은 단순재생산 사회의 부자와 오늘날 확대재생산 사회의 부자들은 그 뿌리부터 다르다.
과거 생산성이 정체되어 있는 단순재생산 시대에서 큰 부를 축적하는 것은, 봉건사회가 아닌 요즘의 잣대로 보면,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수치일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는 근검절약을 통하여 작은 부자가 될 수는 있지만 큰 부자가 되려면 남의 몫을 가로채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총량은 일정한데 누군가가 더 많이 가지면 다른 누군가는 덜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처럼 확대재생산 시대에는 기술혁신을 통하여 부가가치 창출에 크게 기여할수록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으므로, 부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에 기여하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당한 부를 축적한 부자들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상품을 만들어내면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자신도 부자가 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보는 셈이다. 부자가 많아지면 새로운 생산수단을 만들기 위한 자본이 축적되고 이를 통하여 경제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지므로 그 자체가 공동선(共同善)이며 사회정의가 된다.
봉건사회에서는 목숨을 걸고 평민, 농노들을 보호하는 일이 명예였다. 현대사회에서는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그 과정에서 일자리를 제공하는 일이 자랑거리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남의 목숨을 구해주거나, 먹여 살리는 일보다 더 고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건대 `부자가 천당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금언은 그 옛날 단순재생산 사회에서는 거역할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 우월적 신분을 이용하여 남의 몫을 가로채거나, 일을 시키고 품삯을 떼어먹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경구일 것이다.
오늘날에는 연구노력, 기술혁신이 곧 사회에 공헌하는 일이다. 이웃과 사회를 윤택하게 한다면, 즉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기업인에게는 천당이나 극락의 문이 활짝 열려있는 셈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가 커졌음을 의미한다. 사실이지 진정한 기업가에게는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과정 그 자체가 천당이며 극락 세계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오늘날 모든 부자들이 천당이나 극락행이 가능한 것 같지는 않다. 하청업체 허리 분지르기, 중소기업 기술 탈취, 담합과 부당공동행위, 정경유착, 분식회계 같은 수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일은 독버섯이며 사회악이다. 근로자를 머슴도 아니고 하인이나 종으로 취급하는 파락호들이 그 좁은 바늘구멍을 어찌 통과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부의 세습화가 3~4 대 이상 이어지다보니, 부가 `사유 권력`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재계 주변 인사들 가운데는 부자들을 존경하지 않는다고 개탄하는 모습도 보인다. 급기야 존경을 강요하기까지 한다. 존경심의 발로는 존경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아니라 존경받을 사람들 스스로의 마음씀씀이와 행동거지에 달려있음을 모르는 것일까?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일수록 사람들이 정당한 노력을 기울이려 하고 결과적으로 생산성도 높아질 것이다. 부의 축적과 사용에서 귀감을 보이는 부자가 많아질수록 성장과 발전의 바탕이 견고해진다. 부디 우리나라에서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기를 바라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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