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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감과 재벌]② 현대家의 '흑역사'

  • 2013.09.26(목) 14:28

5공 비리특위 청문회에서 시작
사상 초유의 불출석 로비 스캔들

노무현 의원 = 시류에 순응한다는 것이 힘 있는 사람이 하자는 대로 따라 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정주영 회장 = ……
노 의원 = 진작부터 6·29 이전부터 바른말을 하지 못했습니까?
정 회장 = 그러한 용기를 가지지 못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노 의원 = 시류에 순응하는 것이 힘이 있을 때는 권력에 붙고…(중략)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고 보지 않습니까?
정 회장 = ……

 

1988년 헌정 사상 최초로 열렸던 국회 청문회, 이른바 5공 비리특위 청문회의 한 장면이다. 당시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 소속 초선 의원 노무현은 '시류'라는 말을 유행어로 만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강하게 밀어붙여 죄송하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국회 증언을 둘러싼 현대가의 '흑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 5공 비리특위 청문회 당시의 노무현 의원(왼쪽)과 정주영 회장[출처=노무현 사료관]

 

 

◇ 후계자 고 정몽헌 회장의 불출석 로비

 

정주영 회장의 후계자였던 현대그룹 고(故) 정몽헌 회장은 아버지의 전철을 밟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다지 '달변'이 아닌 정몽헌 회장은 국회 증인석에서 국회의원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공격을 받는 것에 대해 공포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현안의 당사자들을 직접 불러 증언을 청취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이기도 하지만 실제 국회에 불려간 증인들은 여야 공방속에서 '정치적 사냥감'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적잖았다.  

 

5공 비리 청문회에서의 굴욕이 있은지 10년이 지난 1999년 현대그룹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국회 정무위 증인으로 채택된 정몽헌 회장은 그 해 국감에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인 2000년에도 정 회장은 현대그룹 로비 의혹 사건으로 정무위에서 증인으로 채택될 것이 확실시 됐다. 다수당인 한나라당 소속 박주천 정무위원장은 "불출석했던 증인들을 검찰에 반드시 고발하겠다"며 정 회장을 압박했다.

▲ 지난 7월 서울 연지동 현대그룹 본사에서 열린 故 정몽헌 회장 추모 10주기 사진전

 

 

현대그룹 로비 의혹을 제기한 야당인 한나라당 뿐 아니라 일부 여당 의원들까지도 증인 채택에 동의한 상황. 비상이 걸린 현대그룹은 '잘못된 관행'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현대는 주력사인 현대건설 고위 간부들에게 학연, 지연 등 정무위 소속 국회의원과 닿을 수 있는 모든 '선(線)'을 찾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수 천만원이 든 돈가방과 함께.

사상 초유의 국회 증인 불출석 로비 사건은 검찰 수사와 법원 판결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박주천 위원장은 국감을 코앞에 둔 9월 김윤규 당시 현대아산 사장으로부터 "국감 증인 명단에서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을 제외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현금 5000만원을 받은 것으로 확인돼, 2004년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한나라당 간사이던 임진출 전 의원도 현금 2000만원을 받았고, 핵심 동교동계로 여당 간사였던 이훈평 의원은 증인 제외 댓가로 지인이 현대건설의 하도급 공사를 맡게 해 준 혐의(제3자 뇌물수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정치권에서 "회장님의 증인 출석을 막아달라"며 대기업 간부들이 국회의원을 상대로 거액의 로비를 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 비밀이 현대의 로비 때문에 일부 공개되면서 "무조건 밀어붙이고 보는 현대그룹식 로비는 안된다"라는 조소와 "걸린 현대만 안됐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잇따라 회장이 증인에서 제외된 모그룹에 대해선 "치밀하게 관리하는 기업은 역시 다르다"는 말도 나왔다.

국회 정무위는 2002년에도 현대그룹 특혜지원 의혹 등을 추궁하기 위해 정 회장 등 현대측 고위 인사 20여명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유력한 대선주자로 부상한 정몽준 의원을 견제하기 위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힘을 합쳤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 '3세'까지 이어진 흑역사

 

정지선(사진)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정주영 회장의 3남인 정몽근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국회는 지난해 대형 유통업체의 골목상권 침해 문제를 다룬 공정거래위원회의 국정감사와 청문회에 정지선 회장을 소환했다. 하지만 정지선 회장은 해외 출장을 핑계로 출석요구 3번에 모두 응하지 않았다. 국회는 정 회장을 검찰에 고발했고 검찰은 그를 400만원에 약식 기소했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법원은 검찰 구형량 보다 많은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이 벌금은 법정 최고액이다. 이 판결을 내린 서울중앙지법 판사는 "국민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며 "증인이 출석을 회피하는 의도로 해외출장을 간 점은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라고 밝혔다.

할아버지의 국회 증언 트라우마가 3세까지 내려간 부분은 현대기아차 정의선 부회장도 해당된다. 

◇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부자 거론될 듯

 

현대그룹이 현대차그룹과 분리되고, 정몽헌 회장이 2003년 사망한 이후 정치권의 관심은 점차 현대차그룹으로 옮겨갔다. 2006년 국감에서 국회 정무위는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과 정의선(사진) 현대기아차 부회장을 부당 내부거래, 글로비스 편법 상속과 관련해 증인으로 채택할 것을 논의했다. 그러나 결국 정 회장 부자는 막판에 제외했다. 같은 해 법사위 국감에서 역시 정몽구 회장과 이건희 삼성회장 증인채택안이 상정됐으나 부결되기도 했다.

 

지난해 국감에서도 정무위는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와 관련해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국회 환경노동위 심상정 의원은 정몽구 회장을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난해 여야 합의로 정 회장 대신 계열사 사장들을 증인으로 출석시켰다.

올해도 심 의원은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로 정 회장 부자를 증인으로 채택하자고 주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한국노동연구원 출신으로, 진보적 성향의 비정규직 전문가로 평가받는 은수미 민주당 의원이 정 회장을 증인대에 세우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국회에 증인으로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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