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3만명을 돌파한 가운데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 인근 국가들도 빠르게 확진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지난달 21일 이탈리아에서 첫 감염 사례가 보고된 이후 이달 18일까지 이탈리아는 확진자가 17명에서 3만1506명으로 급증했고, 같은기간 ▲스페인 2명→1만1178명 ▲프랑스 12명→7652명 ▲독일 16명→7156명 등 인근 국가도 확진자수가 빠르게 늘었다.
유럽의 확진자 급증과 관련해 아직 과학적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확산 초기 단계에서 늑장 대응, 정부 정책에 비협조적인 사회적 분위기 등이 전염병 확산을 촉진한 이유로 거론되고 있다.
코로나19 발병지인 중국 다음으로 확진자가 많이 발생한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점도 확산을 키운 배경으로 꼽힌다.
◇ 유럽 새로운 진원⋯이탈리아, 초동 대응 실패 지적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코로나19 확산세가 이어지자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WHO 사무총장은 지난 13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가진 언론 브리핑에서 "유럽이 이제 코로나19 팬데믹의 새로운 진원지(epicenter)가 됐다"고 언급했다.
해당 발표 직후 이탈리아 정부는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경 봉쇄, 상점 휴업령(약국 등 일부 생필품 상점 제외), 이동 금지 등 강도 높은 대책을 내놓으면서 진화에 나섰지만 사실상 늑장 대응 아니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마테오 렌치 전 이탈리아 총리는 "이탈리아 보건 당국이 바이러스에 대해 파악하기 열흘 전 이미 코로나19는 확산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등 보건 당국이 팔을 걷어붙이기 전에 이미 퍼졌을 가능성도 나온다.
◇ 초고령사회 진입한 이탈리아, 높은 치사율 원인
일부에서는 이탈리아의 고령화된 인구 분포가 치사율을 높이는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노인에 대한 유엔(UN)의 기준은 65세다. 인구통계 사이트 파퓰레이션 피라미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이탈리아의 65세 이상 인구는 약 1365만명으로 전체 6055만명 중 22.6%를 차지한다.
UN은 총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20%를 넘으면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만큼 고령 인구가 많다는 뜻인데, 미국 예일대학과 영국 의학저널 BMJ(British Medical Journal), 미국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가 설립한 의학 논문 사전공개 사이트 메드아카이브(MedRxiv)에 따르면 코로나19 발병 이후 지난 1월부터 2월 간 중국 후베이성에서 발생한 사망자 연령대를 분석한 결과 사망자 중 9.8%가 70대(70~79세), 18%가 80대 이상에서 나타나는 등 고령자 사망 비율이 30%에 육박했다.
지난 18일 WHO가 발표한 코로나19 현황 리포트 기준 이탈리아의 누적 사망자 수는 2503명으로 발원지 중국(3231명)과 큰 차이가 없는 상황이다.
누적 확진자 수 대비 누적 사망자 비율인 치명률은 오히려 이탈리아가 높다. 같은 날 기준 중국의 치명률은 4.0%(누적 확진자 8만1116명, 누적 사망자 3231명)였던 반면 이탈리아는 7.9%(누적 확진자 3만1506명, 누적 사망자 2503명)를 나타냈다.
이탈리아는 지난달 21일 밀라노가 있는 북부 롬바르디아주에서 첫 지역 감염 사례가 확인된 이후 하루 평균 92.7명이 코로나19로 목숨을 잃은 셈이다.
◇ 도마에 오른 부실한 의료 체계⋯병상 마저 부족
늑장 대응 및 인구 고령화와 함께 부실한 의료 체계도 이탈리아의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달 3일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이탈리아 확진자 증가 추세와 관련, 의료 시스템이 대규모 확진자 발생을 불러왔을 가능성을 보도했다.
이탈리아에서 코로나19 거점 지역으로 꼽히는 롬바르디아주의 전체 의료 종사자 중 약 10%가 본인이 인지하지 못한 채 감염됐을 수 있고 이는 전체 감염자의 5%에 해당한다는 내용이다.
이와 관련해 WHO와 유럽질병예방통제센터(ECDC)는 공동 보고서를 통해 이탈리아 병원이 감염 예방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확진자가 증가하는 사이 치료 장비는 물론 병실마저 부족한 상황에 처했다. 이탈리아의 대도시에 비해 의료 인프라가 취약한 롬바르디아주와 같은 지방 도시들은 복도와 회복실 등 가용 가능한 공간을 총 동원해 중환자실로 개조하고 있는데도 병실이 부족해 환자를 다른 지역으로 이송하는 상황이다.
아틸리오 폰타나 롬바르디아 주지사는 "감염자가 매일 늘고 있다"며 "더 이상 중환자실을 마련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가까웠다"고 이탈리아 스카이티지24(SkyTG24)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 이탈리아 전철 밟는 스페인·프랑스⋯수도권 확진자 속출
아직 유럽 전역에서의 바이러스 전파 경로에 대해 과학적으로 증명한 자료는 없지만 이탈리아를 강타한 코로나19에 대한 여파가 인접국들에게까지 미치는 모양새다.
시장조사기관 스타티스티카(Statistica)에 따르면 유럽 내에서 이탈리아 다음으로 많은 확진자가 발생한 스페인은 수도 마드리드가 위치한 마드리드(Madrid) 주를 중심으로 확산세가 심화하고 있다.
프랑스 역시 수도 파리가 있는 일 드 프랑스(Ile-de-France) 지역과 바로 옆의 그랑테스트(Grand-Est) 주에서 확진자가 속출하고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 주에서는 전체 확진자 1만1178명(WHO·17일 기준) 중 4871(43.6%)명이 나왔고 프랑스는 전체 확진자 7730명 중 일드 프랑스에서 22.8%(1762명), 그랑테스트에서 20.0%(1543명)가 발생했다.
불똥이 스페인과 프랑스로 튀면서 각국 정부는 국경 봉쇄, 이동 금지령 등을 선포하며 나라 안팎의 문을 걸어 잠궜다. 약국, 주유소와 같은 필수 상업 시설을 제외한 상점들을 대상으로 휴업령까지 내리는 등 강도 높은 대책을 내놓고 있다.
지난 14일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현재 모든 사람의 생명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비상사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외출자제 의미 이해못해⋯놀러온 사람으로 북새통"
다만 확산 속도를 줄이고 궁극적으로 코로나19 종식을 위해 내놓은 각국의 정책들이 효과를 보려면 더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일부 마드리드 사람들은 외출 자제령이 떨어지고 재택근무가 시행되자 교외, 특히 해안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는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스페인 남동부에 위치한 무르시아 주의 한 고위 관료는 "외출을 자제하라는 정부 방침이 휴일을 뜻하는 게 아니다"며 "놀러 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무르시아주 관광 안내소를 보고 있자면 개탄스럽다"고 전했다.
프랑스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16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코로나19 관련 제1차 대국민 담화에서 "우리는 전쟁 중에 있다"는 말을 강조하며 가급적 여러 명이 모이는 자리를 피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그 주 일요일 지난 15일, 인근 공원은 사람들로 붐빈 가운데 거리에 있는 가판에서는 여전히 음식물을 파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영국 데일리메일이 보도했다.
제롬 살로몽 프랑스 보건 총괄본부장은 "아직 많은 사람들이 외출을 자제하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전염병 확산 속도를 늦추기는 힘들 것 같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