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미리 각본을 짜놓고 연출한 듯한 드라마틱한 등장이다. 존재감 없던 지방 중견 주택건설사 오너가 몇 달만에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거물급 기업인으로 변신할줄 누가 알았겠나?"(한 대형건설사 임원)
작년 10월까지만 해도 재계에서 '김상열'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호반건설은 주택업계에서 최근 수 년간 양호한 분양 성적을 거둔 중견 건설사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 김상열 호반건설 회장을 일각에서는 '은둔의 경영자'라고 불렀다. 세간의 관심 받을 일이 적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과시욕이 없는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회사 홍보실에서 회장 사진이 기사에 실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했을 정도다.
하지만 김 회장과 호반건설이 금호산업의 유력 인수후보로 떠오르면서 얘기는 달라졌다. 인수 의지를 드러내지 않던 초기와는 달리 최근 들어서는 가격, 자금력까지 직접 거론하는 방식으로 금호산업 인수 의지를 보이며 자타공인 호남 재계의 대표주자로 떠올랐다.
◇ 드라마틱한 등장
건설업계 외부에서까지 김 회장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 11월 중순부터다. 포털 검색빈도 통계 서비스인 '네이버 트렌드(trend.naver.com)'를 보면 '김상열'의 검색 빈도는 매각 추진중인 금호산업 주식을 호반건설이 5% 넘게 매입한 것이 드러난 11월 중순부터 급증했다.
당시만해도 호반건설은 금호산업 지분매입 목적에 대해 "단순 투자"라고 설명하며 선을 그었다. "남는 돈을 싼 주식에 투자한 것이다. (인수 포석 등으로) 오해나 확대해석 하지는 말아달라"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호남지역을 대표해온 금호산업을 동향(同鄕)의 신흥 세력인 호반건설이 인수하려는 것일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대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금호산업은 워크아웃(재무구조개선작업)등 수년째 경영난을 겪어온 반면 호반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세를 급속하게 확대해 왔다.
▲ '김상열' 검색횟수를 주간으로 합산해 조회 기간 내 최대 검색량을 100으로 나타낸 그래프(자료: 네이버 트렌드) |
호반건설의 금호 지분 매입 의도에 대해서도 추측이 쏟아졌다. 김 회장이 매물로 시장에 나올 금호를 인수하려는 것인지, 그룹 재건을 생각하고 있는 박삼구 금호아시아나회장의 백기사 역할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호반의 공식 입장처럼 주식투자로 차익만 따내려는 것인지 해석이 분분했다.
하지만 김 회장과 호반은 입을 꾹 다물었고, 이런 '묵비권' 전략은 세간의 관심을 끌어오는 마중물이 됐다.
호반의 금호산업 지분 인수가 '5% 룰'에 따라 공개되고, 지분율을 1%포인트 가량 늘린 뒤 다시 처분하는 2~3개월 사이 금호산업 주가는 출렁거렸고 자연스럽게 김 회장과 호반은 금호산업의 유력 인수후보로 인식됐다.
◇ 잃을 게 없는 승부수
올해 초 호반이 채권단에 금호산업 인수의향서를 제출하면서부터 호반의 행보는 더욱 공개적, 공격적으로 변했다.
특히 김 회장은 호남지역 기업인을 대표하는 자리인 광주상공회의소 회장 선거에 출마해 지난 3월 새 회장으로 당선된 뒤 더욱 적극적으로 금호산업 인수 의지를 밝히기 시작했다.
그는 광주상의 회장 당선 직후, 인수전에 끝까지 참여할 것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완주하겠다는) 기존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답했고, 닷새 뒤 서울 대한상의 총회 자리에서도 인수 가격과 자기자본 등을 거론하며 "체력을 충분히 갖췄다"고 강조했다.
▲ 호반건설-건국대 기부 약정 체결식. 왼쪽부터 김경희 건국대 이사장, 김상열 호반건설 회장, 송희영 건국대 총장(사진: 호반건설) |
결과론적이지만 애초 금호산업 지분 5% 안팎을 매입했다가 일부를 되판 것도 치밀한 노림수였다는 해석이 나온다. 처음 지분 인수 당시 속내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시장에는 가능성 있는 인수 후보라는 신호를 줬고, 이를 되팔아 거둔 300억원대 차익을 통해서도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고 있다.
김 회장은 "차익을 모두 대학과 문화재단에 기부할 것"이라고 밝힌 뒤 건국대 30억원, 사회복지 공동모금회 3억원, 광주대학교 5억원, 동신대학교 5억원, 호반장학재단 12억원, 광주FC 5억원 등 올해에만 60억원 넘는 돈을 풀고 있다.
기부를 통해 재계와 지역사회의 민심을 얻는 동시에 이 정도 돈이 없어도 금호산업을 인수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전략이라는 게 업계의 평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호반이 최종적으로 금호를 인수하는 데 실패하더라도 이미 호남지역 수위 기업이라는 타이틀을 따냈다"며 "회사와 CEO(최고경영자) 마케팅에 대한 부분까지 처음부터 기획한 것이라면 보기 드물게 성공적인 케이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