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장과 상생을 위해 앞으로 채소, 과일, 수산물을 판매하지 않습니다."
22일 오후 1시50분 서울 광진구 중곡제일시장 안에 위치한 이마트 에브리데이 중곡점. 노란색 상의를 입은 직원들이 수박·배·양배추 같은 상품을 걷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점포에서 가장 먼저 둘러보게 되는 맨 우측 신선식품 코너에 놓여진 상품들이다.
에브리데이 중곡점은 이날부터 매출의 20% 가량을 차지하는 신선식품을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신선식품이 차지하던 자리엔 "중곡제일시장을 이용해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김군선 신세계그룹 전략실 부사장은 "전통시장과 상생을 위한 작은 출발로 봐달라"고 했다. 김 부사장은 이번 결정에 앞서 일주일에 한번꼴로 전통시장을 찾아 상생해법을 모색했다고 한다.
▲ 이마트 에브리데이 중곡점에서 한 직원이 진열대에서 야채를 빼내고 있다. |
에브리데이는 중곡점을 시작으로 면목·사당·일산 등 전통시장 안에 위치한 나머지 점포에서도 신선식품을 뺄 예정이다. 그 자리는 전통시장과 중복이 덜한 생활용품·간편가정식·수입과자·애견용품·소형가전 등이 대신한다.
강승협 신세계그룹 전략실 부장은 "해외에선 전통시장이 배추를 팔면 유통업체는 통조림을 파는 식으로 상품을 중복되지 않게 운영해 상생을 모색한 사례가 많았다"며 "중곡점은 그러한 상생사례를 적용한 첫 점포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SSM)이 전통시장에서 파는 상품과 중복되지 않도록 판매품목을 조정한 사례가 국내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 마포구 홈플러스 합정점은 지난해 3월 떡볶이·순대·오징어·풋고추·밤·대추·이면수·코다리 등을 팔지 않는 조건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합정점은 자발적이기보다는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요구에 마지못해 응한 측면이 있고, 게다가 선정된 품목도 비인기 상품에 그친 한계가 있었다. 신세계그룹이 전통시장에 신선식품의 전부라 할 수 있는 92개 품목을 팔지않겠다고 먼저 제안한 것과 차이가 있다.
신세계그룹이 전통시장 안에 있는 에브리데이 점포에서 신선식품을 빼기로 결정한 것은 지난 3월의 일이다. 진병호 전국상인연합회장은 "당시 시장에서 사용하는 검정 비닐봉투만 대신 제작해줘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신세계그룹이 예상밖의 대단한 결정을 해줬다"고 했다.
▲ 우리 사회에서 전통시장과 대형마트, 전통시장과 기업형슈퍼마켓은 대립관계로 여겨져왔다. 신세계그룹은 이 같은 인식을 깨는 실험을 단행했다. 이날 중곡제일시장 상인들의 연합체인 '중곡제일시장협동조합' 사무실 앞에는 에브리데이가 신선식품을 팔지 않겠다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걸렸다. 전통시장과 기업형슈퍼마켓의 동거선언인 셈이다. |
이날 중곡제일시장협동조합 주차장에서 열린 '상생선포식'에서 참석자들은 중곡점의 신선식품 철수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임채운 서강대 교수는 "수많은 상생협약 중 가장 특별한 행사"라며 "지역상권 활성화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 교수는 대형마트와 SSM의 판매품목을 제한하는 것이 출점규제보다 전통시장 활성화에 더 도움된다는 입장을 주장해왔던 학자다. 황미애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서울지역본부장은 "상상만 했던 일인데 와보니 감동받았다"며 기쁨을 표시했다.
중곡제일시장 상인들도 신세계그룹의 결정을 반겼다. 현재 중곡제일시장에는 140여개 상점이 영업하고 있다. 중곡점 인근에서 청과물을 판매하는 한 상인은 "에브리데이가 세일에 들어갈 때마다 어려움이 많았다"면서 "우리 입장에선 당연히 좋은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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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들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선포식에서 흘러나오는 마이크 소리에 걸음을 멈춘 60대 한 여성은 "지난 추석 때만 해도 이마트가 1980원에 팔던 시금치를 시장 상인들은 5000~6000원에 팔았다"면서 "서로 경쟁을 통해 가격이 떨어지는게 우리 입장에선 낫다"고 말했다.
신선식품 철수에 그치지 않고 더 발전된 상생모델을 찾아야한다는 주문도 있었다. 박태신 중곡제일시장협동조합 이사장은 "예를 들어 전통시장이 만든 참기름을 이마트 PB제품 형태로 팔 수 있다면 상인들과 마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대기업이 전통시장을 사업파트너로 인정해 서로 자본투자를 하고 그 이익을 나누는 모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에브리데이의 신선식품 철수는 전통시장 내 입점한 점포에만 한정된다. 신세계그룹은 전통시장 반경 1km 이내 점포로 적용대상을 확대하는 것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신세계 관계자는 "이번 결정도 우리에겐 결과를 알 수 없는 실험이나 다름없다"며 "적용 점포 확대를 얘기하기는 이른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