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오랜 세월을 해왔지만,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 힘이 드는 일입니다. 세상사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직장생활은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겠지만 솔직히 저도 가끔은 '이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고(故)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은 롯데에 입사한지 42년째 되던 해인 지난 2014년초 '어떻게 일하며 성장할 것인가'라는 책의 추천사에서 직장인으로서 느끼는 소회를 이같이 고백했다. 이 부회장은 영업·관리·매입 등 백화점 3대 요직을 두루 거치며 현장에서 실력을 쌓아온 전문 경영인이다.
지난 1987년 계열사 임원직에 오른 후 위아래의 신뢰를 한몸에 받으며 롯데의 경영을 이끌어온 이 부회장은 기업인으로서의 보람과 더불어 책임의 무게 역시 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롯데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을 둘러싸고 지난 6월 검찰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된 후부터 그가 느끼는 책임감은 더욱 커졌을 것으로 관측된다.
핵심 경영진을 향해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드는 것을 보며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예견했던 것일까. 그는 검찰의 조사를 하루 앞둔 어제도 평상시와 다름 없이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한 후 저녁 7시께 퇴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이 평소 온화한 성품으로 알려져 롯데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인해 느끼는 심적 부담이 컸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경영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매니지(Manage)'는 '말의 고삐를 쥐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마네기아레(Maneggiare)에서 유래했다. 기업 간부들은 천박한 장사꾼처럼 일하는 것이 아니라 기사처럼 품격 있게 조직의 고삐를 쥐고 가야 한다"며 경영철학을 밝힌 바 있다.
이 부회장은 44년간 롯데의 성장과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산증인이기도 했다. 그가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1970년대는 한국경제가 빈곤기를 극복하고 산업화의 첫 걸음을 떼던 시절이었다. 1973년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해 롯데에 입사한 이 부회장은 1980년대 '고유가, 고금리, 고환율'의 3고 불황, 1990년대 IMF 외환위기, 2000년대 카드대란 등의 난관을 헤치고 롯데그룹이 재계 5위로 발돋움하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그는 검찰의 소환조사 예정이었던 26일 40년 이상 쌓아온 모든 업(業)을 뒤로 하고 숨진 채로 발견됐다. 청춘을 다 바쳐 키워온 그룹이 경영권 분쟁과 검찰수사 등으로 격랑에 휘말리고, 본인 자신이 핵심 피의자로 지목된 현실에 대한 자괴감도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이 생을 마감한 곳은 그가 안식처로 삼아둔 경기도 양평의 한 전원주택 부지 인근이었다.
그룹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데 힘써온 이 부회장의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롯데그룹은 충격에 빠진 모양새다. 불황으로 가뜩이나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 핵심 수뇌부가 수사 대상에 포함되면서 롯데는 정상적인 경영이 힘든 상황이었다. 여기에 이 부회장이 사망하며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우면서 롯데는 한층 불안한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오랫동안 회사를 든든하게 지켜온 이 부회장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머리속이 하얘진 것 같은 기분"이라고 전했다.
한편 이 부회장은 이날 발견된 유서에 롯데 직원을 향해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