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희생활과학의 지난해 경영활동은 사실상 마비됐다. 주주총회를 열지 않았고, 재무제표도 작성하지 않았다. 단순히 실적이 나빠졌다는 정도가 아닌, 기업 경영의 근간이 한 번에 흔들린 것이다.
진원지는 사업 다각화·해외 진출 실패 등에 따른 실적악화다. 한경희생활과학은 스팀청소기 한 제품으로 뜨겁게 성장했다. 스팀청소기는 2003년 출시 이후 총 1000만대가 넘게 팔리며, '국민 가전기기'가 됐다. 문제는 스팀청소기에 전적으로 의존한 매출구조였다. 회사는 화장품과 정수기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히고 해외 시장 문을 두드렸지만,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특히 2007년 진출한 미국 시장은 회사 발목을 잡았다. 한경희생활과학은 미국법인으로부터 415억원의 매출채권을 회수하지 못해 대손충당금을 쌓거나, 한 대표가 떠안기도 했다. 여기에 뜨겁게 성장하던 스팀청소기도 빠르게 식어갔다. 해외 법인 투자가 한창이던 2009년 회사 매출(976억원)은 정점을 찍고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14년 매출은 633억원, 영업손실은 71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상황은 더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2015년 한경희생활과학 매출은 391억원으로 전년보다 38.3%(243억원) 감소했다. 당기순손실은 342억원으로 손실 폭이 4배 이상 커졌다.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졌지만, 회사 측이 작년 재무제표와 주석 등을 만들지 않으면서 원인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달 한경희생활과학은 과거 10년간 유지했던 사명까지 바꿨다. 한경희생활과학의 사명변경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국제올림픽 위원회, 교육부 사무관 등을 거친 한 대표는 사업의 성공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새긴 사명 덕에 국내를 대표하는 여성CEO로 조명 받았다.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는 후광효과가 십년을 넘기지 못한 것이다.
새 사명은 미래사이언스다.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스팀청소기에서 벗어나 가위칼 등 주방도구로 사업영역을 넓힐 계획이다. 한 대표는 본인의 이름을 사명에서 떼어내고, 내실 경영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회사 관계자는 "기존 사명이 스팀청소기만 부각된다는 의견이 있었다"며 "경영상황을 쇄신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사명을 교체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