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때 다른 결정을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말이 익숙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많은 제품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특히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제품들의 경우 결정적 한 끗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절묘한 한 끗 차이로 어떤 제품은 스테디셀러가, 또 어떤 제품은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비즈니스워치에서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려 합니다. 결정적 한 끗 하나면 여러분들이 지금 접하고 계신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와 함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시겠습니까. [편집자]
#응답하라1987 #부유층의상징 #대대적마케팅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캐릭터 정봉이를 기억하시나요. 당시 정봉이의 연기 중에 폭소를 자아냈던 장면이 있습니다. 이른바 '스팸 먹방'으로 불리는 내용인데요. 정봉은 긴장한 표정으로 스팸 통조림 캔을 한땀 한땀 돌려 땁니다. 예전 스팸은 철제 고리를 걸어 돌려 따야 했습니다. 그러고서는 숟가락으로 스팸을 한 입 크게 베어 먹고는 감동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스팸은 정봉의 어머니인 라미란 여사가 큰맘 먹고 사둔 건데요. 이를 정봉이 몰래 빼돌려 혼자 먹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요즘 스팸은 소비자들에게 '국민 반찬' 정도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물론 끼니마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한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싸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명절 선물로도 각광받고 있고요. 부담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실속형' 선물로 제격입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왜 스팸이 그처럼 고급 제품으로 여겨졌을까요. 단순히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에 스팸 같은 가공육 제품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선진국인 미국에서 들여온 제품은 무조건 좋을 거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요.
지난 1989년 국내 한 매체가 소개한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기사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반가운 기사는 아니지만,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제목부터가 '창피한 외제 음식 선호'인데요.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인들은 요즘 외제 식품인 스팸을 즐겨 찾는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가난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꼬집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값싼 통조림 식품을 한국에서는 부유층의 상징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조롱 섞인 기사입니다.
기사는 스팸이 이렇게 '대접(?)'받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합니다. 우선 외제 식품이면 무조건 고급이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라는 지적입니다. 여기에 더해 외국 제품을 수입·판매하는 국내 기업들의 '광고 작전'에서도 비롯됐다고 분석했는데요. 당시 제일제당은 스팸 전체 판매액의 30%를 광고에 할당할 정도로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쳤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제일제당이 판매를 시작한 1987년에는 애초 예상치보다 3배 이상인 500톤을 팔아치웠다고 하고요. 다음 해인 88년에는 판매액이 두 배로 늘었습니다.
#세계적인명성 #슈퍼마켓 #대중화첫걸음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스팸이 미국에서 들여온 고급 제품이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군 부대 등에서 구할 수 있는 사람만 맛볼 수 있는 일종의 특권층 음식이었던 겁니다. 제일제당은 이런 점에 착안해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스팸을 생산하는 미국 호멜사와 지난 1986년 제휴를 맺었고요. 다음 해인 1987년부터 제품을 본격적으로 생산·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소개한 기사에서는 스팸을 고급 제품으로 여기는 게 '소비자들의 잘못된 인식' 때문이라고 탓했는데요. 제일제당은 이를 되레 사업의 기회로 삼은 셈입니다.
제일제당이 당시 신문 등에 내놨던 광고에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납니다. 광고에는 '세계적인 명성, 세계적인 품질!'이라는 홍보 문구가 가장 눈에 띕니다. 제일제당은 '올림픽 공식 햄의 긍지로 만드는 스팸, 가까운 수퍼에서 손쉽게 구입하세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간 쉽게 구하기 어려웠던 '고급 제품'이라는 점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이제 누구나 동네 슈퍼마켓 등에서 구입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해외 여행을 가서야 사 올 수 있던 '희귀템'을 동네 편의점에서 구입할 수 있게 된 셈이죠. 물론 가격은 조금 비싸겠지만요.
그간 '특권층'만 누릴 수 있던 스팸은 CJ제일제당이 판매한 뒤부터는 비싸지만 구입할 수 있는 음식이 됐습니다. '응답하라1988'에는 이런 장면도 나옵니다. 극 중 '선우 엄마' 이야기인데요. 친정엄마가 갑작스럽게 방문한다는 전화를 받고는 급하게 정봉의 집으로 달려가 스팸을 빌려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인이 어렵게 사는 모습을 '엄마'에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데요. 당시 스팸이 서민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쉽게 구매하기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여유 있는 이웃집에서 빌릴 수 있을 정도는 된 듯합니다.
이 드라마에 스팸이 이렇게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CJ제일제당이 PPL(제품간접광고)을 했기 때문이긴 합니다. 하지만 전혀 없던 얘기를 과장했다는 지적은 없었습니다. 그 시절을 살았던 분들은 많이 공감했던 장면들이었습니다.
#명절 #실속형선물세트 #수요층확대
CJ제일제당은 이후 스팸의 '고급 이미지'는 유지하면서도 수요층을 차츰 확대하는 마케팅 전략을 써왔습니다. 우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CJ제일제당은 스팸을 명절 선물 아이템으로 내세웠습니다. 사실 그전에도 스팸은 명절에 직장 상사에게 주는 선물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CJ제일제당은 이런 점에 착안해 아예 명절용 선물 세트를 만들어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겁니다.
스팸 선물세트가 처음부터 크게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1997년 IMF 사태가 터지면서 스팸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스팸이 '실속형 중저가 선물세트'로 자리매김하게 된 건데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고급 선물'이었던 제품이 이번에는 '실속형 제품'으로 탈바꿈하면서 저변 확대에 나선 겁니다.
이른바 'IMF 체제'에서 처음 맞게 된 추석은 1998년입니다. 당시 LG백화점이 수도권 주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적당한 선물 비용을 3만~5만 원대라고 대답한 비율이 39.6%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IMF로 지갑이 얇아진 때였습니다. 이때 스팸 선물세트는 2만 원대에 팔렸는데요. 명절에 부담 없이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할 만한 수준입니다.
이런 전략은 주효했습니다. 지난 2014년 미국 뉴욕타임즈가 우리나라의 '스팸 사랑'에 대해서 다뤘는데요.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의 '스팸 사랑'이 참 신기한가 봅니다. 이 기사에도 명절 선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사는 "한국에서 스팸의 위상은 남다르다"면서 "특히 명절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고급스러운 선물세트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라고 소개합니다.
그만큼 스팸은 이제 우리나라의 '상징적인' 명절 선물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CJ제일제당에 따르면 실제 스팸의 연간 매출에서 명절 선물 세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60%가량 된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CJ제일제당은 여전히 명절 선물세트 판매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광고를 집중적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많고요. 지난 추석에는 스팸을 포함한 선물세트를 130여 종이나 선보였다고 합니다.
#국민반찬 #따뜻한밥에스팸한조각 #절대맛스팸
CJ제일제당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스팸을 '국민 반찬'으로 각인시키기 위한 마케팅 전략에 돌입합니다. 지금 우리가 스팸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문구가 있죠. '따뜻한 밥에 스팸 한 조각'이라는 광고 문구가 2002년에 처음 등장합니다. 당시 모델은 배우 김원희 씨였습니다.
이 광고는 말 그대로 '신의 한 수'였다는 평가를 듣습니다. 이로써 스팸은 특권층만 구할 수 있는 고급 제품에서 실속형 명절 선물로, 다시 언제나 밥상에 올려놓고 먹을 수 있는 '밥반찬'으로 소비자들에게 각인되시 시작합니다. '마케팅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따뜻한 밥에 스팸 한 조각'이라는 카피를 쓴 건 지난 2011년까지였습니다. 이 광고 문구를 쓰지 않은 지가 어느덧 10년이 다 돼갑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비자들에게 회자되는 점을 보면 이 광고는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CJ제일제당은 '밥반찬' 마케팅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뒀다고 판단했습니다. 이후 다시 선물세트 수요 확대에 나섰는데요. 2018년에는 '어떻게 먹어도 맛있는 맛, 절대 선물세트'라는 문구를 선보입니다. 스팸을 밥반찬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해 먹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한 겁니다. 올해부터는 '절대 맛 스팸'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습니다.
최근 국내 식품 업계에서는 가정간편식(HMR)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집에서 품을 들여 조리해야 하는 다양한 음식을 '간편하게' 해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입니다. 여기에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국내 HMR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 중입니다. HMR 제품들은 주로 국이나 밥반찬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소시지나 햄, 참치 등 가공식품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고 합니다. 스팸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 맛 스팸'이라는 슬로건은 이런 흐름에서 나왔습니다. '반찬'으로서 입지가 흔들린다면, 소비자들이 스팸을 반찬뿐만 아니라 다양한 조리법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CJ제일제당의 복안입니다.
스팸은 다시 '변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국민 밥반찬'에서 '만능 요리 재료'로 말입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조만간 스팸 굿즈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스팸의 마케팅 전략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만나봤습니다. 그 주인공은 지난 2007년 스팸 마케팅팀에 합류해 지금까지 스팸 마케팅의 변화를 지켜봐 온 김세원 CJ제일제당 육가공 마케팅 팀장입니다.
#스팸마케팅 #현재와미래 #김세원CJ제일제당팀장
-최근에는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마케팅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가?
▲ 국내 식품 시장에는 HMR 등 반찬으로 먹을 게 많아지는 추세다. 이에 따라 스팸을 반찬뿐만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즐길 수 있도록 한다는 게 최근의 마케팅 포인트다. 지난 7월 배우 유연석 씨를 모델로 발탁해 '절대 맛 스팸'이라는 슬로건으로 광고를 하는 것도 이런 마케팅의 일환이다. 올해는 명절 선물 세트 판매보다 레시피 확대에 더욱 주력하는 만큼 광고도 오히려 명절을 피해 6~8월 바캉스 시즌에 집중해 내보냈다.
-다양한 용도라는 건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 예전에는 스팸을 썰어서 구워 먹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제는 통으로 에어프라이어에 굽는 방법 등 다양하게 활용해 먹을 수 있다. 최근에는 스팸의 용도 확대 목적으로 간식용 스팸 제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맥스봉 직화구이 꼬치바 스팸'이라는 제품이다. 맥스봉 꼬치바 원육에 스팸을 넣어서 만들었다. 스팸을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개념이다. 용도를 간식으로 확장한 셈이다.
-새로운 마케팅 전략의 효과는 나타나고 있는가?
▲ 내부적으로는 광고 효과가 괜찮다고 판단하고 있다. 올해 판매 실적도 괜찮게 나오고 있고, 시장 점유율도 지난해보다 올라가는 추세다. 지난해 58%에서 올해 59% 정도로 점유율이 높아졌다.
-요즘 식품 업계에서는 개성 있는 광고를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스팸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 최근에 동원의 경우 배우 조정석 씨를 발탁해서 광고를 재미있게 풀었다. 인상적이었다. 스팸의 경우에는 조금 진중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스팸이 정말 맛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기본 콘셉트를 버릴 수는 없다는 판단이다.
-스팸의 경우 워낙 잘 알려진 제품이라 과연 마케팅 효과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광고 자원을 투입했을 때 매출 신장이라는 재무 성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제품은 아니다. 신제품의 경우 급격하게 올라가는 경우가 있는데 스팸의 경우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케팅을 하는 처지에서 조금 허탈한 면도 있다(웃음). 하지만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 나타난다.
-스팸의 주요 고객층은 누구인가?
▲ 아무래도 주부들이다. 다만 스팸을 구매하는 목적은 본인이 먹는다기보다는 가족들 반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희가 조사해본 결과 스팸 구매의 주요인 중 하나가 집에서 자녀가 원해서다. 주로 자녀가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일 때 가장 많이 이용한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가공식품을 잘 안 먹이려 하고, 대학생이 되면 집에서 밥을 안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 다양한 마케팅을 전개할 계획이다. 일단 조만간 스팸과 관련한 굿즈를 내놓을 예정이다. 또 레시피 확대를 위해 최근 유연석 씨와 온라인 쿠킹 클래스를 진행했다. 인스타그램 등 SNS에도 다양한 레시피를 제안하고 있다. 아울러 주부뿐 아니라 10~20대 등 잠재 고객에게 브랜드를 노출하는 노력도 지속할 예정이다. 이런 일환으로 최근에 웹드라마 '솔로 말고 멜로'라는 작품에 스팸을 PPL로 광고하기도 했다.
-평소에 스팸을 많이 먹는가?
▲스팸 마니아다. 우리 가족은 전부 헤비 유저라고 할 수 있다. 주로 숟가락으로 퍼서 맥주 안주로 즐기곤 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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