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때 다른 결정을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말이 익숙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많은 제품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특히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제품들의 경우 결정적 한 끗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절묘한 한 끗 차이로 어떤 제품은 스테디셀러가, 또 어떤 제품은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비즈니스워치에서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려 합니다. 결정적 한 끗 하나면 여러분들이 지금 접하고 계신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와 함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시겠습니까. [편집자]
#스팸의두얼굴 #미국에선정크푸드 #한국에선선물세트
지난 추석은 잘 보내셨습니까. 코로나19 탓에 그리운 가족들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자 유통업계의 추석 선물세트 매출이 전년 대비 두 자릿수 신장했다고 하네요. 애틋한 만큼 선물에 더 공을 들이기 마련입니다.
혹시 '스팸' 선물세트를 받아보셨나요. CJ제일제당에서 나오는 '캔햄' 말입니다. 주방을 꾸리는 입장에서 유독 반가운 선물이 스팸입니다. 마트에서 흔히 살 수 있는 제품임에도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미국에서 탄생한 스팸은 정크푸드의 대명사로 꼽힙니다. 짠맛이 강하다보니 생고기의 다양한 풍미를 기대하기도 힘들고 갈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스테이크 등 미국식 요리법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인기가 많은 제품입니다. 명절기간에만 연간 매출의 60%가 팔려나갑니다. 한국산 스팸만의 특별한 비결이 뭘까요?
#전쟁 #고기 #고급식재료
스팸은 지난 1937년 미국 호멜식품(Hormel Foods)에서 처음 만들었습니다. 전투식량으로 각광을 받았죠. 제2차 세계대전에서 1억개나 팔리는 대박을 쳤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스팸은 미국 내에서 저렴한 가격을 내세워 저소득층이 즐겨 먹는 식품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스팸이 한국에 유입된 것도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보급로를 통해서입니다. 미군이 가져오기 시작한 스팸은 고기를 먹기 힘들었던 전쟁세대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결과 스팸은 부유층이나 미군 부대와 연줄이 있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귀한 음식이 됐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정크푸드지만 한국에서는 고급식재료로 통했습니다. '미국 제품'이라면 무조건 믿고 동경했던 시절이었던 만큼 우리 국민들은 미군이 전해준 스팸을 고급 식재료로 인식했습니다. 스팸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여러 유통경로를 통해 한국에서 소비됐습니다. '부대찌개'도 이때 생겨났습니다.
이후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이 호멜과 기술제휴를 통해 1987년 5월부터 스팸을 국내에서 직접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스팸의 가격은 일반적인 햄 가격보다 비쌌다고 합니다. 하지만 출시 첫해에만 500톤이 판매되면 대박을 터트립니다. 스팸은 한국에서 고급스러우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를 가지게 됐습니다. 한국이 전세계 스팸 판매량 2위를 차지하는 이유입니다.
#예민한한국인 #1㎜의차이 #같지만다르다
그런데 맛도 달랐을까요. 사실 한국산 스팸이라고 해서 미국산과 맛의 차이가 크지는 않습니다. 지난 2008년부터 다양한 맛의 스팸이 시장에 출시되고 있지만 기본이 되는 스팸 클래식은 미국 제품과 맛을 동일하게 유지하는 게 목표입니다. 한국산 스팸 클래식은 미국의 스팸 라이트와 맛이 비슷합니다. 미국의 스팸 라이트가 한국에서 스팸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팔린다고 이해하면 쉽습니다.
맛은 같지만 품질은 다릅니다. 이것이 인기의 비결입니다. 혀에서 느끼는 맛은 같을지라도 입안에 넣고 씹을 때 느껴지는 식감과 풍미, 향 등 전체적인 품질에서 미국 제품과 차이가 있다는 게 CJ제일제당 관계자들의 설명입니다.
우선 한국산 제품은 스팸을 만들 때 고기를 자르는 크기가 미국과 다릅니다. 미국산 스팸은 4㎣로 고기를 조각내 스팸을 만듭니다. 하지만 한국은 3㎣로 자릅니다. 이유는 까다로운 한국 소비자들 때문입니다. 4㎣ 제품을 생산할 때는 이물감이 느껴진다며 클레임을 걸어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고기 외에 이물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힘줄이나 연골 등을 혀로 느낀 섬세한 소비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CJ제일제당은 연구 끝에 입자 크기를 3㎣로 바꿉니다. 단 1㎣의 차이가 무슨 대수겠냐고 하시겠지만 제조사 입장에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4㎣를 3㎣로 바꾸면 재료 크기가 4분의 1이나 변합니다. 재료의 배합비와 순서, 온도 등 전 공정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연구진 입장에서는 할 일이 많았습니다.
#전분없이탱탱하게 #비결은숙성 #이것은김치인가스팸인가
재료의 차이도 있습니다. 미국 스팸의 주요 재료는 총 6가지입니다. 돼지고기와 소금, 전분, 물, 아질산나트륨 그리고 설탕입니다. 전분은 스팸 속의 수분을 유지하기 위한 재료입니다. 전분과 소금이 만나면 스팸이 더 쫄깃해지는 효과도 있습니다. 아질산나트륨은 육가공제품에서 보툴리누스균이 생기는 것을 막고 지방의 산화를 방지해줍니다.
반면 한국 스팸의 주재료는 5가지입니다. 돼지고기와 소금, 물, 아질산나트륨, 설탕입니다. 한국 스팸에는 전분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스팸은 오리지널이 있는 제품입니다. 그리고 맛과 품질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목표입니다. 당연히 주요 재료 중 하나를 빼고 만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과거 CJ제일제당이 미국 스팸과 동일한 레시피로 스팸을 만들 때에는 '스팸은 고급 햄인데 왜 밀가루가 들어가냐'는 클레임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제품성분표의 '전분'을 밀가루 동급이라 생각하고 항의를 한 겁니다.
한국은 가공식품에 '가루'가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는 소비자들이 많습니다. 과거 경제가 좋지 못하였던 시절 일본에서 건너온 어육소시지에 밀가루와 각종 첨가물을 혼합한 소시지가 한국에서 대거 유통됐었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일명 '분홍 소시지'가 대표적입니다. 밀가루가 들어가다 보니 소시지를 먹고 소화가 잘 되지 않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전분은 밀가루보다 소화가 잘되지만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전분에도 거부감이 높았습니다.
CJ제일제당은 연구 끝에 스팸에 전분을 넣지 않고도 수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비결을 찾아냅니다. 바로 '숙성'입니다. 한국산 스팸은 재료를 모두 섞어 조리한 뒤 하루 정도 숙성과정을 추가로 거칩니다. 숙성이 끝난 뒤에야 캔에 담고 밀봉한 뒤 고온살균 과정을 거쳐 완제품이 됩니다. 숙성은 다른 나라에서 생산되는 스팸에서는 하지 않는 과정입니다. 그 결과 한국산 스팸은 전분이 들어가지 않고도 전분이 들어간 미국 제품처럼 촉촉하고 탄력이 있는 식감을 유지하게 됐습니다.
#알아도못따라해 #맛은같아도품질은남달라
보시다시피 스팸은 한국에서 특별하게 성장해왔습니다. 단순히 제품을 많이 팔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소비자의 높은 품질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진화입니다. 스팸을 만드는 방법을 처음 전수해 준 호멜은 원래 제조법으로 제품을 만들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세계 각국에서 만들어진 완제품을 받아보고 검수해 출시해도 좋다는 협의를 해줍니다.
호멜이 허용해 준 자율성과 CJ제일제당의 품질향상을 위한 노력 덕분에 한국산 스팸이 특별해졌습니다. 현재 CJ제일제당이 스팸에 적용하고 있는 이물질 선별 프로세스와 품질·기준규격 관리 노하우 등은 호멜도 벤치마킹할 정도입니다.
이는 CJ제일제당의 자부심입니다. CJ제일제당은 스팸 제조과정에 들어간 각종 기술에 대해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제조과정의 운용과 관리, 재료의 취급역량 등은 경쟁사가 안다고 해서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CJ제일제당의 입장입니다. 실제 스팸은 국내 캔햄시장에서 50%가 넘는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시장지배자입니다.
이처럼 한국산 스팸이 특별해진 것은 CJ제일제당 식품연구소의 공이 큽니다. 지난 2002년부터 CJ제일제당의 육가공식품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송민석 육가공식품팀 부장을 만나봤습니다.
#스팸맨 #오로지연구 #송민석CJ제일제당부장
- 미국 스팸과 한국 스팸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가?
▲ 얼핏 맛만 본다면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큰 차이가 있다. 우선 품질이 다르다. 한국 소비자들은 굉장히 까다롭다. 클레임도 활발하다. 미국에서는 정크푸드지만 한국에서는 고급식품이라는 이미지 때문인 것 같다. 그 결과 품질관리를 위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져 현장에 적용됐다. 전분도 뺐고 재료 크기도 줄였다. 그러면서 맛은 유지하고 있다.
- 스팸은 육가공제품 중에서도 짠 편이다. 나트륨이 과다하다는 소비자들의 지적도 있을 텐데 여전히 스팸이 짠 이유는 무엇인가?
▲ 스팸을 만들 때 공정을 그대로 유지하더라도 소금만 확 줄이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는가? 일단 수분유지가 안된다. 과일통조림처럼 흥건한 물이 생기게 된다. 수분이 빠지다보니 탱탱한 식감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퍽퍽한 고기만 남게 된다. 또 소금을 넣지 않으면 비린내도 올라온다. 결과적으로 현재 스팸과는 전혀 다른 고기 덩어리가 된다. 현재 스팸의 소금양은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만 사용한다. 스팸을 물에 데친 뒤 조리하거나, 다른 간을 하지 않고 스팸의 소금기만으로 요리를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소금섭취량을 조절하는 것이 좋다.
- 통조림에 들어간 햄 제품 자체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편견이 있다. 스팸은 건강에 나쁜 음식인가?
▲ 아니다. 스팸은 오히려 안전한 음식이다. 스팸이 한 캔 완성되기 까지 안전을 위해 15가지가 넘는 항목검사를 거쳐야 한다. 그 기준도 한국이 유독 높다. 그리고 사실 캔으로 만든 식품이라는 것은 '안전'할 수밖에 없다. 장기간 보존을 위해 제품 품질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요인을 다 제거했기 때문이다. 캔은 완전 밀봉이 되다보니 방부제 등을 안써도 만들 수 있고, 제품의 변형 없이 고온고압의 살균처리도 할 수 있다. 산소접근을 완전 차단해 산화도 막는다. 철저한 안전식품이다보니 상온에서 3년 넘게 보관해도 품질에 변화가 없다. 최근 논란이 된 아질산나트륨 등의 첨가물도 최소한도로 사용한다. 오히려 스팸보다 시중에 유통되는 김치에 아질산나트륨이 더 많이 들어있다.
-최근 다양한 스팸 제품이 출시되는 것 같다. 계기가 있는가.
▲ 2008년까지는 스팸의 맛을 유지하고 품질을 높이는 데 연구역량이 집중됐다면, 이후에는 소비자의 입맛이 다양화되면서 제품 라인업도 다양하게 만들어보려는 노력이 많아졌다. 그 결과 베이컨맛, 치즈맛, 양파맛, 마늘맛 등 다양한 스팸제품을 만들었다. 이런 제품은 한번 출시하고 끝이 아니다 소비자의 입맛이 변하는 만큼 계속 연구개발을 통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