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엄포라네요."
지난달 30일 예금보험공사에서 열린 '금융그룹 통합감독 세미나' 현장. 금융위원회 금융그룹감독혁신단의 강연이 끝나고 휴식시간에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날 세미나 현장 분위기를 전한 기사에 대한 이야기였고 대화중에 종종 웃었다. 호기심에 기자도 해당 기사를 찾아봤다. 금융당국이 금융그룹 관계자를 불러 엄포를 놨다는 기사였다. 하지만 현장에선 '실속없이 호령이나 위협으로 으르는' 엄포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차라리 너무 조용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날 교보생명과 롯데, 미래에셋, 삼성, 한화, 현대자동차, DB 등 7개 금융그룹 임직원 100여명이 참석했지만 금융위 관계자 강연이 끝난 뒤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당장 내년부터 금융그룹 통합감독이 시행되니 궁금한 점이 많았을텐데 100명의 기업 관계자는 침묵했다. 오히려 KB금융지주와 신한금융지주가 리스크관리체계 사례를 발표한 세미나 2부가 끝나자 질문이 쏟아졌다.
금융위 관계자는 "1부 내용은 이미 발표된 내용이라 궁금한 것이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럼 왜 바쁜 기업 임직원 100여명을 불러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었을까, 혹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금융당국이 어렵고 눈치 보여 질문을 못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금융위가 금융그룹 통합감독을 추진하자 금융회사를 끼고 있는 기업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금융당국의 규제가 금융회사를 통해 그룹 최상층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는 기업들의 목소리를 듣고 금융그룹 통합감독 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정책당국의 섬세하지 못한 '탁상행정'에 통합감독이 시행되기 전부터 기업들은 당황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금감원이 발표한 '금융그룹 그룹리스크 주요 유형 및 사례' 보도자료가 대표적이다. 금감원은 이날 7개그룹 임원을 불러 그룹리스크 사례를 보여주며 주의를 당부했다. 문제는 익명으로 처리한 리스크 사례가 언론 보도를 통해 실명이 밝혀졌다는 점이다.
리스크 사례 9개중 6건은 미래에셋이었다. 미래에셋대우와 네이버의 자사주 교환, 미래에셋캐피탈의 신종자본증권 발행 자금으로 계열사 출자 등이 사례로 제시됐다. 이 밖에 삼성중공업 증자에 참여한 삼성생명, 롯데마트 결제 비중이 높은 롯데카드, 현대자동차 할부물량이 많은 현대캐피탈 등도 나왔다. 언론은 금융당국이 미래에셋 등에 경고했다고 썼고 금융당국 사정권에 든 기업들은 우왕좌왕했다.
이에 대해 금융위 관계자는 "금융그룹 통합감독이 이런 것이라는 사례를 보여주려고 했을 뿐"이라며 "보도 과정에서 회사 실명이 노출될지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금융당국이 무심코 던질 돌에 개구리가 맞은 격이다.
금융위는 오는 6월 금융계열사가 보유한 비금융계열사 지분에 대한 자본확충 방식을 공개한 뒤 그 다음달부터 금융그룹 통합감독을 시범실시할 예정이다. 제도시행을 코앞에 두고 금융당국은 업계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했지만 업계는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금융당국이 허술한 익명처리와 같이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업계가 굳이 속내를 숨기거나 말을 삼킬 이유는 없을 것이다.
최근 만난 금융위 고위 관계자에게 금융그룹 담당자들은 어떤 점을 가장 어렵다고 말하냐고 물었다. 이 관계자는 "업계에서 도입 시기를 연기해 달라 제안하거나 위(지배기업)에서 지시가 내려오는 상황에서 금융회사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목소리가 많다"고 전했다. 업계에서 어렵게 꺼낸 말을 금융당국이 쉽게 흘려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야 당국과 업계가 소통할 수 있고, 제도가 시행된 뒤에도 뒤탈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