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우수함이 곧 상업화의 척도가 아니다. 확장하는 기업은 자신이 왜 이 일을 하는지 명확히 설명하고, 투자자와 언론으로부터 필요한 도움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버티컬(Virtical)'의 제이슨 힐(Jason Hill) 최고전략책임자(CSO)가 2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제약바이오협회 주최로 열린 '글로벌 바이오 투자 생태계의 재편' 콘퍼런스 세션에서 이같이 말했다. 버티컬은 헬싱키에 본사를 둔 액셀러레이팅 투자사다. 제이슨 힐 CSO는 해외 스타트업 투자 및 글로벌 바이오 투자를 맡고 있다.
이날 콘퍼런스에는 핀란드를 비롯해 호주·벨기에·미국·중국 등 5개국 바이오 투자자들이 참석해 글로벌 투자 환경 변화를 짚었다. 이번 자리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국내 자금 조달 환경 속에서 글로벌 투자자들의 시각과 전략을 직접 듣기 위해 마련됐다.
국내 바이오 기업들은 고금리 환경과 기업공개(IPO) 시장 둔화가 맞물리면서 자금 조달에 이중고를 겪고 있다. 높아진 금리는 자본 조달 비용을 끌어올리고, IPO마저 여의치 않으면서 엑싯 경로도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글로벌 투자 환경도 접근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은 공공펀드, 국부펀드, 벤처캐피탈 등 다양한 자본이 뒤섞인 다층적 투자 구조로 재편되고 있으며, 경쟁 무대도 글로벌로 확장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기업들의 글로벌 투자 유치와 해외 파트너십 확보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시장 침체가 아닌 구조 전환"
이날 좌장을 맡은 허경화 한국혁신의약품컨소시엄(KIMCo) 대표는 바이오 투자환경이 더욱 선별적이고 제한된 기업에 기회가 부여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각에서는 글로벌 바이오 시장이 침체기에 들어선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는 현 상황에 대해 글로벌 투자자들은 '시장 침체'가 아닌 '구조적 전환기'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제이슨 힐 CSO는 "과거 투자자들이 기술적 매력에 주목했다면, 이제는 기업의 운영 환경과 사업 구조, 판매 전략, 가치 제안까지 회사 전반을 살핀다"며 "이는 구조적 전환이지 시장 침체라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 기술의 등장이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도 짚었다. 그는 "AI가 바이오 기업 운영 전 과정에 영향을 미치면서, 투자자 입장에서 기업을 평가하는 데 있어 불확실성이 오히려 더 커진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단계별 자금조달 전략 세워야
다층적인 투자 환경이 형성되면서, 바이오 기업들의 자금 조달 전략도 연구 단계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캐리 리 싱클레어(Kerri Lee Sinclair) 호주 바이오산업협회 디렉터는 변화한 환경 속에서 기업이 투자자 앞에 훨씬 더 준비된 상태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임상 1상 단계의 기업이라 하더라도 상용화까지 어떤 방식으로 지원받을 수 있는지, 다음 단계에서 누구에게 투자받을 것인지에 대한 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자산의 단계에 맞는 자본을 유치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공적 자금, 연구 자금, 민간 자금이 각각 들어가야 하는 단계가 다르다. 망치를 들면 못만 보이듯, 특정 자금 조달 방식에만 매달리면 성장 단계에 맞지 않는 결정을 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엑싯 전략의 다양화 필요"
장-크리스토프 르노르댕(Jean-Christophe Renondin) 벨기에 바이오 투자자는 "시장에 현금은 있지만 유동성이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바이오 산업에서 돈의 흐름을 만들어줄 적절한 투자 단계가 제대로 구성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IPO를 통한 엑싯 전략이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으면서 펀드가 투자자들에게 자금을 돌려주기 어려워지고, 재투자로 순환되는 구조도 약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출구전략의 다양성이 제한된 점을 구조적 문제로 꼽았다. 르노르댕은 "한국 기업들은 사업이 완성되지 않은 초기 단계에서 IPO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유럽과는 구분되는 특징"이라며 "유럽에서는 IPO보다 매각을 더 현실적인 출구 전략으로 고려한다"고 말했다.
바이오 연구·투자 "결국 사람이하는 일"
보스데브 베일리(Vausdev Bailey) 미국 투자자는 여섯 차례의 창업 경험을 토대로 "자금 조달이 어렵다는 말은 맞지만, 좋은 과학과 좋은 데이터가 있는 기업에는 여전히 자본이 몰린다"고 강조했다.
그는 벤처 투자와 연구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인만큼 네트워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술만큼 중요한 것이 사람과 네트워크, 신뢰"라며 "벤처투자는 기술뿐 아니라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어떤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의 문제"라고 말했다.
패널들은 공통적으로 '바이오텍 투자 환경은 달라졌지만 투자 판단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좋은 과학기술과 데이터에 글로벌 확장 전략, 신뢰할 수 있는 팀, 명확한 엑싯 로드맵이 더해질 때 비로소 투자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